명성황후탄강구리비(明成皇后誕降舊里碑)는 경기도유형문화재 제41호로 소재지는 경기도 여주시 명성로 71이다.
명성황후 민씨의 생가에 남아 있는 비로, 비가 서있는 이 자리는 어렸을 적 그녀의 공부방이 있던 터라고 한다. 이 비는 명성황후가 공부했다는 방이 있던 자리에 세워진 것으로 반듯한 사각받침돌 위로 비몸을 세우고, 지붕돌을 올려놓은 모습이다. 비의 높이는 1.5m 폭 64㎝ 두께 46㎝로서 네모난 기단에 세워져 있다. 정면 1칸, 측면 1칸의 14평 규모의 비각에 보존되어 있다.
비의 앞면에는 ‘명성황후탄강구리(明成皇后誕降舊里, 명성황후가 태어난 옛 마을)’라는 비의 명칭을 새겼고, 뒷면에는 ‘광무팔년갑진오월일배음경서(光武八年甲辰五月日拜飮敬書, 광무 8년 갑진오월 어느날 엎드려 눈물을 머금고 공경히 쓰다)’라 새겨놓았다. 탄강(誕降)은 왕이나 성인이 세상에 태어났음을 말하고, 구리(舊里)는 고향이라는 뜻이다. 글씨를 쓴 이는 알 수 없으나 황태자 시절의 순종이 썼을 것으로 추측된다.
1904년에 세운 것으로, 세울 당시에는 생가가 제법 규모를 갖추고 있었다 하나, 현재는 일부만 남아있다. 비를 보호하고 있는 비각은 많이 퇴색되고 낡아서, 1970년도에 새로이 보수하였다.
(자료출처 : 문화재청 / 경기문화포털 / 『경기문화재총람-도지정편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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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내용 출처 : 경기문화포털
명성황후(明成皇后, 1851∼1895)
명성황후는 1851년(철종 2) 9월 25일 여주군 근동면 섬락리(지금의 여주읍 능현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조선왕조의 명문가인 여흥 민씨 가문 출신인 민치록(閔致祿)이며 어머니는 한산 이씨이다.
여흥 민씨는 명성황후 이전 조선왕조에서만 2명의 왕비를 배출하였다. 태종의 비 원경왕후와 숙종의 계비 인현왕후가 그들이다. 원경왕후는 우리나라 최고의 성군으로 추앙받는 세종대왕의 어머니이며, 인현왕후는 명성황후의 직계 6대조인 민유중(閔維重)의 딸이자 민진후, 민진원의 누이동생이다.
명성황후는 어려서부터 매우 총명했던 것으로 『실록』의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다. 부친으로부터 한학을 배웠는데 배우는 것마다 잘 습득하였다고 한다. 또한 심오한 뜻의 어려운 것도 분별해서 대답하였고 기억력이 비상하여 조목조목 통달하였으며, 책 읽는 것을 좋아하였다. 명성황후는 8세에 부친을 여읜 후 여주 생가에서 서울 안국동 감고당(感古堂)으로 이사하였다. 그녀는 그곳에서 한 살 아래인 고종과 혼인하는 1866년까지 생활하였다.
명성황후는 개항으로부터 임오군란, 서구열강과의 조약체결, 갑신정변, 조로밀약사건(朝露密約事件), 동학농민봉기와 갑오개혁 등 한국 근대사의 굵직한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주요 인물로 언급되었다. 또한 고종과 함께 국정을 고민하면서 외국 사신들이나 신하들을 인견하였으며, 각종 인사나 정책 결정에도 관여하였다.
이러한 점으로 인해 임오군란 등 각종 사건에서 그녀가 공격의 표적이 되거나, 그녀에 대한 평가가 후하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남성 위주의 유교적 가부장 사회의 기록이기 때문에 더욱 그럴 것이다. 외부에서 본 명성황후는 개성이 강하고 냉철한 인물이었다. 새로운 문물과 외부 사정에 관심이 많았고 새로운 것에 대한 탐구심도 상당히 깊었다. 적극적이고 열린 마음으로 서양의 외교관들과 선교사 등을 많이 접했기 때문에 세계를 바라보는 안목은 조정 대신들을 앞섰을 것이다. 열국의 외교관들을 통해 일본공사를 견제하고자 한 것도 이러한 경험과 판단에서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명성황후는 왕비로 책봉된 후 주변 열강들의 침략, 특히 일본의 침략에 맞서 이이제이(以夷制夷)의 정책으로 대항하는 정치적 탁월성을 보여주었다. 일본으로서는 이러한 명성황후가 소위 대륙 진출을 가로막는 거대한 바위와 같았을 것이다. 결국 그들은 ‘국모시해’라는 당시 전 세계가 경악한 만행을 저지르고 말았다. 1895년 명성황후 시해사건과 급진적인 단발령은 이후 항일의병운동의 도화선이 되었다.
『경기문화재대관-도지정편』.
『(경기도 역사와 문화) 백문백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