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로사비(大老祠碑)는 경기도유형문화재 제84호로 소재지는 경기도 여주시 하동 199-1번지이다.
조선 후기의 대유학자인 우암 송시열(1607∼1689) 선생의 제사를 모시는 대로사(大老獅, 현 강한사)의 내력을 적은 비로, ‘대로’선생에 대한 존칭이다. 우암 송시열은 인조 11년(1633)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여 경릉참봉(敬陵參奉)을 거쳐 봉림대군의 사부(師傅)가 되었으며 후일 효종의 총애를 받았다. 효종 9년(1658) 이조판서에 승진되어 북벌계획을 추진하기도 하였다. 우의정을 거쳐 현종 13년(1672) 좌의정이 되었다. 현종 15년(1674)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服喪)문제로 일시 유배되었다가 남인이 실각하자 영중추부사로 기용되었으며 숙종 9년(1683) 봉조하(奉朝賀)가 되었고 노론의 영수(領袖)가 되었다.
그 후 정계에서 은퇴하여 청주 화양동에서 은거하였으며, 숙종 15년(1689) 왕세자(경종) 책봉 문제로 상소를 했다가 제주에 유배되었다. 그 뒤 국문(鞫問)을 받기 위해 상경 도중 남인의 책동으로 정읍에서 사사(賜死)되었다. 일생을 주자학(朱子學) 연구에 몰두한 거유(巨儒)로 이이(李珥)의 학통을 계승, 기호학파의 주류를 이루었다. 예론에 밝았으며 뛰어난 학식을 지녔고 많은 제자를 길러냈다. 시호는 문정(文正)으로 문묘(文廟), 효종묘(孝宗廟)에 배향(配享)되었다.
선생은 여주에 머무를 때마다 효종의 능을 바라보고 통곡하며, 후배들에게 북벌의 대의를 주장했었다 한다. 정조가 영릉을 행차하다가 이 말을 전해 듣고 김양행에게 대로사를 짓도록 명하였다. 이는 노론과의 관계가 좋지 못했던 정조가 노론이 받드는 송시열을 높여줌으로써 노론의 불만을 달래려 한 정치적 의도를 말해준다. 대로사는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이 내려졌을 때에도 강한사(江漢祠)로 이름만 바뀐 채 화를 면하였다.
대로사비는 방형 대석 위에 비신을 세우고 그 위에 지붕 모양의 개석(蓋石)을 얹었다. 앞면에는 ‘대로사비’라는 전서(篆書) 제목이 있고 나머지 면에 정조(正祖)가 짓고 쓴 비문이 있다. 정조 11년(1787)에 세운 비로, 정조가 친히 글을 짓고 글씨를 썼다.
(자료출처 : 문화재청 / 『경기문화재총람-도지정편1』)
『경기문화재대관-도지정편』
『문화재 현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