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대년신도비(鄭大年神道碑)는 경기도유형문화재 제148호로 소재지는 경기도 여주시 점동면 장여로 561이다.
이 비는 조선 전기의 문신인 사암 정대년(1507∼1578) 선생의 공적을 기리고 있다. 정대년의 자는 경노(景老), 호는 사암(思菴), 본관은 동래(東萊)다. 그는 예문관 대교를 지낸 정전(鄭筌)의 아들로서 청백리로 이름이 높았다. 정대년은 중종 27년(1532)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한 뒤 여러 관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권신 윤원형이 첩을 정부인을 삼은 데 대한 사실 여부를 밝히라는 왕명을 받들고 조사하던 정대년은 윤원형이 뇌물로 이를 무마하려 하자 완강히 거절하기도 하였으며, 선조 초에 육조의 장을 추천하라는 왕명이 있자 모두가 서슴없이 그를 추천할 만큼 명망이 있었다고 한다. 선조 11년(1578) 이조판서가 되었다가 우의정에 임명되었으나 이를 사양하고 관직에서 물러났다.
비는 네모난 받침돌 위에 비몸을 세우고 머릿돌을 얹은 모습이다. 받침돌에는 영지무늬와 연꽃무늬를 새겼으며, 머릿돌에는 용과 구름무늬를 빈틈없이 조각하였다. 쌍룡과 여의주가 새겨져 있는 이수의 조각이 매우 섬세한 편이다. 비문에는 정대년의 성장과정과 관직생활, 그리고 간소한 생활 등이 적혀 있으며 부인의 집안과 성품, 자손들에 대해서도 기록하고 있다.
이 신도비는 손자 정호가 영의정 노수신이 지은 비문을 새기려 하였다가 임진왜란으로 실행치 못한 것을, 뒤에 병조참판 오준의 글씨와 홍문관부제학(왕의 자문기관인 홍문관의 정 3품 벼슬) 김광현이 쓴 비명칭을 받아서 증손인 양우·양필 형제가 세웠다. 비 뒷면에는 이러한 사실과 자손 170명의 명단을 충청도관찰사 정양필이 적어, 예조정랑(예조의 정 5품 벼슬) 유시영이 글씨를 썼다.
원래 정대년을 비롯한 동래정씨 사암공파의 선산은 광주(현 성남시 신흥동)에 있었으나 신도시 개발사업으로 인하여 1986년 현재의 위치로 옮겨졌으며, 1996년도에는 문중에서 비각을 건립하였다.
(자료출처 : 문화재청 / 여주문화원 / 경기문화포털 / 『경기문화재총람-도지정편1』)
『경기문화재대관-도지정편』
『문화재 현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