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몽장군묘(李順蒙將軍墓)는 경기도기념물 제92호로 소재지는 경기도 양평군 개군면 공세리 산28-3번지이다.
대마도 정벌에 큰 공을 세운 조선 초기의 무관 이순몽(李順蒙, 1386~1449) 장군을 모신 유택이다. 봉분은 쌍분으로 부인과의 합장묘이다. 봉분은 화강암 장대석을 이용하여 2단의 호석(護石)을 장방형으로 두른 장방원형분(長方圓形墳)으로 고려의 묘제를 이어받은 전형적인 조선 초기의 양식이다. 좌측의 장군 봉분 앞에 묘비와 상석이 있고, 우측의 부인 봉분 앞에는 묘비 없이 상석만이 있다. 묘역의 전방에는 문인석이 좌우로 2쌍 배열되어 있는데 모두 복두(幞頭)를 쓰고 공복(公服)을 입고 홀(笏)을 든 전형적인 조선 전기 양식이다.
묘 앞에는 구묘비와 신묘비, 상석, 문인상 4기 등이 배치되어 있다. 구묘비(총높이 103㎝, 폭 47㎝, 두께 12㎝)는 화강암재로 대석과 비신이 하나의 돌로 조성되었다. 비신은 이수가 없고 상부가 말각된 형태이다. 비의 전면에는 『領中樞院事永川李公之墓(영중추원사영천이공지묘)』라 기록되어 있고, 후면에는『正統己巳十月立(정통기사시월립)』이라는 비를 세운 연도가 음각되어 있어 이순몽이 세상을 떠난 해인 세종 31년(1449)에 비석이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신묘비는 1997년에 건립되었는데, 비문은 이원윤(李源胤)이 짓고, 이유원(李裕源)이 썼다.
이순몽은 태종(太宗) 5년(1405) 음직(蔭職)으로 벼슬에 오르고 태종 17년(1417) 무과에 급제하여 태종 18년(1418) 의흥위절제사(義興衛節制使) · 동지총제(同知摠制)가 되었다. 세종(世宗) 원년(1419) 우군절제사(右軍節制使)에 임명되어 이종무(李從茂 : 1360~1425) · 김효성(金孝誠 : ?~1454)등과 대마도 정벌의 큰 전과를 거두었다. 세종 7년(1425) 진하사(陳賀使)로 중국에 다녀왔다. 세종 15년(1433) 중군절제사(中軍節制使)로 두만강 일대를 수없이 노략질하던 파저강(婆猪江)의 야인(野人)인 이만주(李滿住)의 소굴을 완전히 소탕하는 큰 공을 세우고 돌아오자 세종은 노비와 옷과 신발을 내려주었고,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로 승진시켰다. 세종 29년(1447)에는 영중추원사(領中樞院事)에 이르렀다.
(자료출처 : 양평문화원 / 『경기문화재총람-도지정편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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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내용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홈페이지)
이순몽(李順蒙)
생몰연대 : 1386(우왕 12)∼1449(세종 31).
본관은 영천(永川). 아버지는 응(應)이며, 어머니는 전주최씨(全州崔氏)로 판서 병례(丙禮)의 딸이다. 1405년(태종 5) 음직(蔭職)으로 벼슬에 올라 1417년 무과에 급제, 1418년 의용위절제사(義勇衛節制使)·동지총제가 되었고 1419년(세종 1) 우군절제사에 임명되었다. 그 뒤 경상좌도병마절제사·중군도총제·좌군도총제·충청도병마도절제사·삼군도진무(三軍都鎭撫)·영중추원사(領中樞院事) 등을 역임하였다.
1419년 우군절제사로 이종무(李從茂)·우박(禹博)·박초(朴礎) 등과 함께 대마도 정벌에 나서 여러 장수들은 모두 패하였으나 그는 김효성(金孝誠)과 함께 대전과를 거두어 대마도주 도도웅이(都都熊耳)가 항복하고 수호를 요청하였다.
1425년 진하사(陳賀使)로 중국에 들어가 선종(宣宗)이 즉위함을 축하하였다. 1433년 중군절제사가 되어 파저강(婆猪江)의 야인인 이만주(李滿住)를 토벌하여 큰 공을 세우고 돌아오자 세종은 노비와 의화(衣靴)를 내려주었고 총애가 극진하였다.
1434년 경상도도절제사, 1447년 영중추원사를 지냈다. 영천의 삼현사(三賢祠)와 숭렬당(崇烈堂)에 봉향되었다. 시호는 위양(威襄)이다.
『경기문화재대관-도지정편』
『양평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