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음이덕형선생묘및신도비(漢陰李德馨先生墓및神道碑)는 경기도기념물 제89호로 소재지는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목왕리 산82번지이다.
조선 선조(宣祖) 때 많은 활약을 하였던 이덕형(李德馨, 1561~1613)을 모신 유택이다. 봉분은 단분으로 부인 한산이씨(韓山李氏)와의 합장묘이다. 이덕형(李德馨, 1561~1613)은 조선중기의 문신으로 자는 명보(明甫), 호는 한음(漢陰), 본관은 광주이다.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이민성(李民聖)의 아들이며, 영의정 이산해의 사위이다. 어려서부터 문학에 통달하여 어린 나이로 양사언(楊士彦)과 가까운 사이였다. 또한 어렸을 때 이항복과 막역한 사이로 많은 일화가 알려져 있다. 선조 13년(1580)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거쳤으며, 임진왜란이 일어나 왜적이 패수까지 올라와 화의를 청하자 이덕형은 단독으로 적진에 들어가 대의로서 그들을 공박하였다. 그 뒤 정주까지 왕을 호종하였고, 청원사로 명나라에 파견되어 명군의 파병을 성취시켰다. 정유재란시 좌찬성에 올랐고, 좌의정을 역임하였다. 1601년 행판중추부사로 경상, 전라, 충청, 강원 4도체찰사를 겸하여 전란뒤의 민심수습과 군대의 정비에 노력하였으며 이듬해 영의정이 되었다. 한때 영중추부사로 한직에 있다가 1608년 광해군이 즉위하자 영의정에 복직되었다. 광해군 5년(1613) 영창대군의 처형과 폐모론을 반대하다가 삭직(削職)되었고 이 때 양근에 내려와 국사의 그릇됨을 상소하며 세월을 보내다 53세로 병사하였다. 인조 때 복관되었고, 시호는 문익(文翼)이다.
봉분은 화강암 석재를 이용하여 원형으로 호석(護石)을 둘렀다. 봉분 앞에는 묘비·상석·향로석이 있고, 묘비를 중심으로 좌우에는 망주석이 배치되었고, 장대석(長臺石)을 이용해 횡(橫)으로 쌓은 계체석(階砌石) 아래 상석을 중심으로 좌우에 동자상과 문인석이 배치되어 있다. 묘역은 1984년 새로이 단장되었는데, 호석과 계체석은 새로 조성된 석물이다.
신도비(높이 356㎝, 폭 110㎝, 두께 42㎝)는 효종 4년(1653)에 세운 것으로 비문은 조경(趙絅)이 찬했으며, 글씨는 오시수(吳始壽)가, 전자(篆字)는 정규상(鄭奎祥)이 썼다. 신도비는 장방형 비좌와 이수를 갖춘 형태이다. 귀부는 용과 괴운문으로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다. 현재 비는 정면 1칸, 측면 1칸의 전각 내에 세워져 있다. 신도비에서 동쪽으로 약 150m 떨어진 곳에 위치하는 영정각은 1977년에 문중에서 건립한 것으로, 홍살문과 경중문(敬重門), 영정각(影幀閣)으로 구성되어 있다. 영정각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내부에는 이덕형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다.
(자료출처 : 양평문화원 / 『경기문화재총람-도지정편2』)
내용 더보기
※ 아래내용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홈페이지)
이덕형(李德馨)
생몰연대 : 1561(명종 16)∼1613(광해군 5).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명보(明甫), 호는 한음(漢陰)·쌍송(雙松)·포옹산인(抱雍散人). 부사과(副司果) 수충(守忠)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증 좌찬성 진경(振慶)이고, 아버지는 지중추부사 민성(民聖)이며, 어머니는 현량 유예선(柳禮善)의 딸이다. 영의정 이산해(李山海)의 사위이다.
어려서부터 재주가 있고 침착했으며, 문학에 통달해 어린 나이로 양사언(楊士彦)과 막역한 사이였다 한다. 1580년(선조 13) 별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해 승문원(承文院)의 관원이 되었으며, 재주 있는 신하로 선발되어 선조로부터 서적을 받았다.
1582년 명나라에서 온 조사(詔使) 왕경민(王敬民)이 만나보고 싶어했으나 사적인 면대는 도리에 어긋남을 들어 사양하였다. 이에 왕경민은 만나보지 못함을 아쉬워하며 그의 인격을 칭찬하는 글귀를 보내왔다고 한다.
이어 정자를 거쳐 1583년에 사가독서(賜暇讀書 : 문흥 진작을 위해 유능한 젊은 관료들에게 독서에 전념하도록 휴가를 주던 제도)를 하였다. 이듬 해서총대(瑞葱臺)의 응제(應製)에서 장원을 했고, 이 외의 시험에서 여러 차례 수석을 차지하였다.
그 뒤 부수찬·정언·부교리를 거쳐 이조좌랑이 되었고, 1588년 이조정랑으로서 일본사신 겐소(玄蘇) 등을 접대해 그들의 존경을 받았다. 1590년에는 동부승지·우부승지·부제학·대사간·대사성 등을 차례로 지내고, 이듬 해 예조참판이 되어 대제학을 겸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 때 북상중인 왜장 고니시(小西行長)가 충주에서 만날 것을 요청하자, 이를 받아들여 단기(單騎)로 적진으로 향했으나 목적을 이루지 못하였다. 왕이 평양에 당도했을 때 왜적이 벌써 대동강에 이르러 화의를 요청하자, 단독으로 겐소와 회담하고 대의로써 그들의 침략을 공박했다 한다.
그 뒤 정주까지 왕을 호종했고, 청원사(請援使)로 명나라에 파견되어 파병을 성취시켰다. 돌아와 대사헌이 되어 명군을 맞이했으며, 이어 한성판윤으로 명장 이여송(李如松)의 접반관(接伴官)이 되어 전란 중 줄곧 같이 행동하였다. 1593년 병조판서, 이듬해 이조판서로 훈련도감당상을 겸하였다.
1595년경기·황해·평안·함경 4도체찰부사가 되었으며,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명나라 어사 양호(楊鎬)를 설복해 서울의 방어를 강화하는 한편, 스스로 명군과 울산까지 동행, 그들을 위무(慰撫)하였다. 그 해 우의정에 승진하고 이어 좌의정에 올라 훈련도감도제조를 겸하였다.
이어 명나라 제독 유정(劉綎)과 함께 순천에 이르러 통제사 이순신(李舜臣)과 함께 적장 고니시의 군사를 대파하였다. 1601년 행판중추부사(行判中樞府事)로 경상·전라·충청·강원 4도체찰사를 겸해 전란 뒤의 민심 수습과 군대 정비에 노력하였다.
그리고 대마도정벌을 건의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이듬 해 영의정에 올랐다. 1604년 이항복(李恒福)이 그의 공을 들어 호성공신(扈聖功臣)에 녹훈할 것을 건의했으나 본인의 사양과 시기하는 자들의 반대로 책록되지 못하였다.
1606년 영중추부사가 되었다가, 1608년 광해군이 즉위하자 진주사(陳奏使)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다시 영의정이 되었다. 1613년(광해군 5) 이이첨의 사주를 받은 삼사에서 영창대군(永昌大君)의 처형과 폐모론을 들고 나오자 이항복과 함께 이를 적극 반대하였다.
이에 삼사가 모두 그를 모함하며 처형을 주장했으나, 광해군이 관직을 삭탈해 이를 수습하였다. 그 뒤 용진(龍津)으로 물러가 국사를 걱정하다 병으로 죽었다. 남인 출신으로 북인의 영수 이산해의 사위가 되어 남인과 북인의 중간 노선을 지키다가 뒤에 남인에 가담하였다.
어렸을 때 이항복과 절친한 사이로 기발한 장난을 잘해 많은 일화가 전해진다. 글씨에 뛰어났고, 포천의 용연서원(龍淵書院), 상주의 근암서원(近巖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한음문고 漢陰文稿≫가 있다. 시호는 문익(文翼)이다.
『경기문화재대관-도지정편』
『문화재 안내문안집 2』
『양평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