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경선생묘(李浚慶先生墓)는 경기도기념물 제96호로 소재지는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목왕로 308-41(부용리 산35-1번지)이다.
조선 초기 문신으로 각종 사화(士禍) 속에서도 나라의 안녕을 도모하려 애쓴 동고(東皐) 이준경(李浚慶, 1499~1572)을 모신 유택이다. 이준경(李浚慶, 1499~1472)은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자는 원길(原吉), 호는 동고(東皐), 남당(南堂), 홍련거사(紅蓮居士)이며, 본관은 광주(廣州)이다. 홍문관수찬 이수정(李守貞)의 아들로, 신승연(申承演)과 황효헌(黃孝獻)에게서 학업을 닦고, 이연경(李延慶) 문하에 들어가 성리학을 배웠다. 그는 연산군(燕山君) 10년(1504) 갑자사화(甲子士禍) 때 할아버지와 아버지에게 연좌되어 6세의 어린 나이로 괴산에 유배되었다가 1506년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풀려났다. 중종 26년(1531)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였고 홍문관부수찬(弘文館副修撰)으로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죄를 받은 선비들의 무죄함을 중종에게 역설하다가 오히려 권신(權臣) 김안로(金安老 : 1481~1537) 일파의 미움을 받아 파직당하였다. 중종 32년(1537) 다시 등용되어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 · 대사헌(大司憲) 등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으나 명종(明宗) 5년(1550) 영의정 이기(李芑 : 1476~1552)의 모함으로 보은에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석방되어 지충추부사(知中樞府事)가 되었다. 이후 우의정·좌의정을 거쳐 명종 20년(1565)에 영의정에 올랐다. 선조(宣祖) 때에 원상(院相)으로 국정을 보좌하면서 기묘사화로 죄를 받은 조광조(趙光祖 : 1482~1519)의 억울함을 풀어주었다. 또한 을사사화(乙巳士禍)로 억울하게 유배 생활을 한 노수신을 비롯한 인재를 석방하여 등용하는 등의 공적을 세웠다.
봉분은 단분으로 부인과의 합장묘이며, 장대석을 이용하여 호석(護石)을 둘렀다. 봉분 앞에는 묘비 · 상석 · 향로석이 있으며, 상석의 전방에는 장명등이 있고, 장명등을 중심으로 좌우에는 망주석과 문인석이 1쌍씩 배치되어 있다. 봉분 앞의 묘비는 근래에 세운 것인데, 원래의 묘비는 노수신(盧守愼 : 1515~1590)이 찬(撰)하여 조선 선조(宣祖) 18년(1585)에 건립한 것으로 마모가 심하여 현재는 수원대학교 박물관에 이관되어 있다.
묘소입구에 위치한 신도비(총높이 156㎝, 폭 55㎝, 두께 25㎝) 역시 1581년 세워진 후 세 번째 조성된 것이다. 원래 1581년에 노수신(盧守愼)이 찬하여 세워졌는데 임진왜란 때 파손되었던 것을 1962년에 후손들이 중심이 되어 중건하였다. 지금의 비는 1984년에 다시 조성된 것이다. 비문은 1581년 처음 신도비가 세워질 때 노수신이 지은 것으로 이준경의 약력과 분당에 관한 우려 등 그와 관련된 일화가 기록되어 있다.
(자료출처 : 양평문화원 / 『경기문화재총람-도지정편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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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내용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홈페이지)
이준경(李浚慶)
생몰연대 : 1499(연산군 5)∼1572(선조 5).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원길(原吉), 호는 동고(東皐)·남당(南堂)·홍련거사(紅蓮居士)·연방노인(蓮坊老人). 서울 출신. 극감(克堪)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판중추부사 세좌(世佐)이고, 아버지는 홍문관수찬 수정(守貞)이며, 어머니는 상서원판관 신승연(申承演)의 딸이다.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 때 화를 입어 사사된 할아버지와 아버지에 연좌되어 6세의 어린 나이로 형 윤경(潤慶)과 함께 충청도 괴산에 유배되었다가 1506년 중종반정으로 풀려났다. 외할아버지 신승연(申承演)과 황효헌(黃孝獻)에게서 학업을 닦고, 이연경(李延慶) 문하에 들어가 성리학을 배웠다.
1522년(중종 17) 사마시에 합격해 생원이 되고, 1531년(중종 26) 식년 문과에 을과로 급제해 한림을 거쳐 1533년 홍문관 부수찬이 되었다. 그 해 말 구수담(具壽聃)과 함께 경연에 나가 중종에게 기묘사화 때 화를 입은 사류들의 무죄를 역설하다가 오히려 권신 김안로(金安老) 일파의 모함을 받아 파직되었다.
1537년김안로 일파가 제거된 뒤 다시 등용되어 세자시강원필선·사헌부장령·홍문관교리 등을 거쳐 1541년 홍문관직제학·부제학으로 승진되고 승정원승지를 지냈다. 그 뒤 한성부우윤·성균관대사성을 지냈고, 중종이 죽자 고부부사(告訃副使)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형조참판이 되었으며, 1545년(인종 1) 을사사화 때는 평안도관찰사로 나가 있어 화를 면하였다.
1548년(명종 3) 다시 중앙으로 올라와 병조판서·한성부판윤·대사헌을 역임했으나 1550년 정적이던 영의정 이기(李芑)의 모함으로 충청도 보은에 유배되었다가 이듬 해 석방되어 지중추부사가 되었다. 1553년 함경도지방에 야인들이 침입하자 함경도순변사가 되어 그들을 초유(招諭 : 불러서 타이름)하고 성보(城堡)를 순찰하였다.
이어 대사헌과 병조판서를 다시 지내고 형조판서로 있다가 1555년 을묘왜란이 일어나자 전라도도순찰사로 출정해 이를 격퇴하였다. 그 공으로 우찬성에 오르고 병조판서를 겸임했으며, 1558년 우의정, 1560년 좌의정, 1565년 영의정에 올랐다. 1567년 하성군 균(河城君 鈞 : 선조)을 왕으로 세우고 원상(院相)으로서 국정을 보좌하였다.
이 때 기묘사화로 죄를 받은 조광조(趙光祖)의 억울함을 풀어주고, 을사사화로 죄를 받은 사람들을 신원하는 동시에 억울하게 수 십년간 유배 생활을 한 노수신(盧守愼)·유희춘(柳希春) 등을 석방해 등용하였다. 그러나, 기대승(奇大升)·이이(李珥) 등 신진 사류들과 뜻이 맞지 않아 이들로부터 비난과 공격을 받기도 하였다. 1571년(선조 4) 영의정을 사임하고 영중추부사가 되었다.
임종 때 붕당이 있을 것이니 이를 타파해야 한다는 유차(遺箚 : 유훈으로 남기는 차자)를 올려 이이·유성룡(柳成龍) 등 신진 사류들의 규탄을 받았다. 저서로는 ≪동고유고≫·≪조선풍속 朝鮮風俗≫ 등이 있다. 선조 묘정에 배향되고, 충청도 청안(淸安)의 구계서원(龜溪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정(忠正)이다.
『문화재 안내문안집 2』
『경기문화재대관-도지정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