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계서원(雲溪書院)은 경기도문화재자료 제18호로 소재지는 경기도 양평군 용문면 용문산로 192번길 16-21(덕촌리 산4-2번지)이다.
이 서원은 조선 명종(明宗) 때의 학자인 조욱(趙昱 : 1498~1557) 선생의 덕업을 기리고자 그의 제자들이 효종(孝宗) 5년(1654)에 건립한 서원이다. 대원군(大院君)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된 후 수차례의 중건을 거듭하여 오늘에 이른 것으로 짐작된다.
조욱 선생은 19세 때 생진양과(生進兩科)에 급제하여 순릉(順陵), 영릉(英陵) 등의 참봉(參奉)을 지냈으며 후에는 벼슬을 버리고 용문산(龍門山)에 은거하면서 많은 후학을 가르쳐 용문 선생(龍門先生)이라 칭함을 받았다고 한다.
건물은 재실(齋室) 1채와 사당(祠堂)만 남아 있다.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이고 홑처마의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다. 기단은 외벌대의 막돌쌓기로 되어 있고 기둥은 원형의 두리기둥으로 되어 있다. 측면 2칸 중 후측 칸은 방화벽을 두었고 각 칸은 모두 띠살문(세살문)을 달아 놓았다. 기둥 머리는 초익공 형식으로 되어 있고 촛가지의 형태가 기둥마다 달라 수차례의 개수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이 곳 사당에는 조욱 선생 외에 다섯 분의 신위(神位)를 봉안하고 매년 제사를 올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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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내용 출처 : 양평문화원
운계서원(雲溪書院)은 조욱(趙昱)과 조성(趙晟), 신변(申忭), 조형생(趙亨生), 조문형(趙門衡) 등 5위를 제향한 서원이다. 서원의 본래 명칭은 용문서원(龍門書院)으로 효종 5년(1654)에 사림들이 조욱이 말년에 은거하면서 후학들을 가르쳤던 세심당(洗心堂)이 있던 곳에 조욱과 그의 형 조성, 그리고 신변을 제향하고 용문서원이라고 한 것이 그 유래이다. 당시 용문서원 상량문은 이경석(李景奭, 1595~1671)이 지었다.
그 후 숙종 40년(1714) 박세구 등이 상소를 올려 사액을 청하였다.(청액소, 1714년 박세구 찬) 그러나 조정에서는 조성과 신변의 경우 “학문의 깊이에 관하여 선배들의 표장(表章)이 없어 후학들이 상세히 알지 못하기 때문에 함께 제향하는 문제를 경솔하게 의논하기가 어렵다”라고 하여 사액을 보류하였다고 한다.(찬자 미상, 재청액소, 지평향교지) 지평사림들은 그해 다시 사액을 청하는 상소를 올려 숙종 40년(1714)에 마침내 조욱과 조성 만을 제향하여 용문서원이라고 사액을 받았다.
이에 지평사림들은 같은 해 9월 28일 지평동헌 옆에 향현사를 건립하여 조욱의 손자인 조형생, 조욱의 증손인 조문형과 함께 제향하였다.(청액소 1714년 박세구 찬) 정조 22년(1798) 지평유생 민성유(閔聖游) 등이 상소하여 특명으로 권경우(權景祐, 1448~1501)를 추가로 제향하였다.(수곡서원지)
그 후 헌종 4년(1838)에 왕이 양평 용문사(龍門寺)에 행차했다가 서원의 이름이 절의 이름과 같다고 하여 운계서원(雲溪書院)으로 개칭하도록 하였으며, 이때 향현사에 모셔져 있던 조문형을 운계서원에 추가로 제향하였다.(조문형 묘갈에는 헌종 4년(1838) 용문서원을 운계서원으로 개칭함과 동시에 추향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1899년 나온 지평읍지에는 조문형의 향현사가 별도로 기재되어 있음) 그러다가 고종 8년(1871)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하여 서원이 훼철되어 위패를 서원 터에 매안(埋安)하고 단을 설치하여 향사만 지내왔다. 그 뒤 1932년에 지평의 유림들과 조원호(趙元鎬)를 비롯한 조욱의 후손들이 협력하여 현 위치에 서원을 복원하였는데, 권경우는 후손들이 별도로 수곡서원을 세우고 이향하였으므로 조욱과 조성, 신변, 조형생, 조문생 5인만을 제향하게 되었다. 1958년부터 조욱의 탄생일인 음력 8월 21일 향사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서원은 남동향을 정면으로 하고 있으며, 경내 건물로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사우, 정면 3칸, 측면 3칸의 강당, 신문, 동서 협문 등이 있다. 조선말기에 건축된 것을 근간에 보수한 것으로 추정되는 사우에는 조욱을 주벽(主壁)으로 조성, 조형생, 신변, 조문형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또, 근대에 건축된 것으로 추정되는 강당은 중앙의 마루와 양쪽 협실로 되어 있는데 원내의 여러 행사와 유림의 회합 및 학문강론 장소로 사용되고 있다. 매년 음력 8월 21일에 향사를 지내고 있다.
관련유적으로는 서원에서 1㎞정도 떨어진 덕촌리 퇴촌마을의 남서편 절벽에 조욱이 후학을 가르쳤다고 전해지는 세심정이, 덕촌리 퇴촌마을에서 북동쪽으로 약 700m 떨어진 남쪽 구릉에는 조욱의 묘가 있다.
제향인물
① 조욱(趙昱, 1498~1557)
조선 중기의 학자로 자는 경양(景陽), 호는 용문(龍門)․세심당(洗心堂)․우암(愚庵)․보진재(葆眞齋)이고, 본관은 평양(平壤)이다. 판관 조수성(趙守諴)의 아들로 중종 11년(1516)에 생원․진사 양시에 합격한 후 조광조(趙光祖)․김식(金湜)의 문하에 들어가 공부하였다. 중종 14년(1519) 기묘사화 때 두 스승과 연루되어 수감되었으나 나이가 어리다고 하여 화를 면하였다.
이후 과거에 뜻을 두지 않고 형인 조성(趙晟)과 함께 외가가 있는 삭녕(朔寧) 옛 전장(田庄)에 집을 짓고 학문을 강론하며 지냈다. 48세 되던 해 지평(砥平)의 용문산 아래에 은거하면서 평양조씨가 지평에 입향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명종 7년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장수현감(長水縣監)까지 올랐다. 그 후 다시 지평 용문산 옛 은거지로 돌아와 오로지 후학을 가르치는데 힘썼다. 영조 16년(1740)에 이조참의(吏曹參議)에 추증되었으며, 헌종 9년(1843) 이조판서겸 성균관제주로 추가 증직되었다. 저서로는 정조 3년(1779)에 발간된 『용문집』이 있다. 시호는 문강(文康)이다.
② 조성(趙晟, 1492~1555)
조선 중기의 음악이론가, 학자, 의원이다. 자는 백양(伯陽), 호는 양심당(養心堂)으로 조수성(趙守諴)의 아들이자 조욱의 형이다. 중종 8년(1513) 생원시에 합격하여 벼슬이 부사과를 거쳐 의영고 령(義盈庫 令)에 이르렀다. 유학 이외에도 천문, 지리, 의약, 율려(律呂), 산수까지 정통하였고 군직(軍職)에 나가서는 의술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조광조(趙光祖)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아 특히 성리학에 밝았으며, 필법에도 능하였다. 또한, 거문고의 명인으로서 이득윤(李得胤)의 『고금금보문견록(古今琴譜聞見錄)』과 『송씨이수삼산재본금보(宋氏二水三山齋本琴譜)』에「조성보(趙晟譜)」가 전한다. 저서로는 『양심당집(養心堂集)』이 있다.
③ 조형생(趙亨生, 1564~1628)
조욱의 손자로 조인빈(趙仁賓)과 전의 이씨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호는 둔곡(遯谷)이며 이식, 임숙영(任叔英), 정엽(鄭曄) 등과 막역한 사이였다.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왕을 따라 강화도에 가서 적을 물리쳤고, 다음해 65세로 세상을 떠났다. 증손인 조중벽(趙重壁)이 높은 벼슬을 받자 사복 시정에 증직되었다.
④ 조문형(趙門衡, 1617~1700)
조욱의 증손이자 조익생(趙益生)의 넷째 아들로 자는 민보(敏甫), 호는 둔촌(遁村)이다. 김순(金洵)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웠으며, 윤휴(尹휴)와 교유하였다. 숙종 6년(1680) 경신환국으로 서인이 정권을 잡은 뒤 천거를 받아 선공감역(繕工監役), 전생서주부(典牲署主簿)에 올랐다. 숙종 8년(1682) 지례현감이 되었을 때 진휼을 잘하여 백성들이 비를 세워 공을 기리기도 하였으나, 숙종 12년(1686) 반대파의 모함으로 한때 파직되었다. 숙종 26년(1700) 노직(老職)으로 당상관의 품계를 받았다. 아들인 조방흥(趙邦興)이 자헌대부에 오르자 가선대부 이조참판에 추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