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등사함허당득통탑및석등(懸燈寺涵虛堂得通塔및石燈)은 경기도유형문화재 제199호로 소재지는 경기도 가평군 하면 현등사길 34이다.
탑과 석등은 조선초인 1411년에 현등사를 중창했던 함허대사의 사리탑으로 경내에서 약간 떨어진 서남쪽에 있는 팔각원당형부도(八角圓堂型浮屠)로 높이는 약 266cm 이다.
둥근 탑신에 함허무준(涵虛無準)이 가로로 음각된 것이 아니라 세로로 함허당득통이라고 전서(篆書)로 음각되어 있다. 팔각형의 지대석 위에 2단의 8각형 기단을 두어 전체적으로 3단의 기단위에 둥근 탑신을 올려놓은 듯한 모습이다. 옥개석은 8모지붕으로 물매가 급하며 처마끝까지 반전없이 그대로 내려간다. 상륜부에는 하단의 돌로 노반과 복발을 만들었으며 보륜과 보주도 역시 하나의 돌이다. 함허대사가 입적할 때가 1433년이고, 이로부터 멀지않은 시기에 조성되었을 것이므로 이 부도는 조선초기 부동의 양식을 살피는데 중요한 자료이다. 부도의 앞에는 높이 120cm의 규모가 매우 작은 석등이 있다. 이와같이 부도 앞에 석등이 배치되는 예는 고려말~조선초의 부도에서 찾을 수 있다.
전체형태가 평면적인 방형으로 되어있어 마치 조선시대에 유행한 장명등(長明燈)과 비슷하다. 석등몸체에는 함허(涵虛)라는 글이 새겨져있다고 하나 마멸이 심해 확인할 수는 없다.
(자료출처 :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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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내용 출처 : 『경기문화재총람-도지정편(1~3)』
기화(己和, 1376~1433)
조선 초기의 배불(排佛) 정책 속에서 불교를 수호한 고승으로 성은 유씨(柳氏). 호는 득통(得通), 당호는 함허(涵虛)이다. 처음 법명은 수이(守伊)이며, 처음 법호는 무준(無準)이다. 충추 출신. 21세 때 친구의 죽음을 보고 출가의 뜻을 굳혔다.
1410년에는 개성의 천마산 관음굴(觀音窟)에서 선을 크게 진작하였다. 1414년 평산(平山)의 자모산 연봉사(烟峰寺)에 작은 방을 얻어 함허당(涵虛堂)이라 명명하고, 그 곳에 머물면서 세 차례 『금강경오가해설의(金剛經五家解說誼)』를 강의하였다. 그는 불교와 유교의 회통(會通)뿐 아니라 도교까지 포함한 삼교일치를 제창하였다. 이 삼교일치의 사상은 신라 말 최치원의 사상에서도 나타나지만 본격적인 것은 그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기화는 조선 초기의 배불 정책이 극에 이르렀을 때, 불교의 정법(正法)과 그 이치를 밝힘으로써 유학의 불교 비판의 오류를 시정하고자 노력한 고승이었다. 저서로는 『원각경소(圓覺經疏)』, 『금강경오가해설의(金剛經五家解說誼)』, 『함허화상어록(涵虛和尙語錄)』이 전하여진다.
『아름답고 살기 좋은 가평의 문화유적』
『가평군의 역사와 문화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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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등사함허당득통탑및석등.pdf (170.2 KB)
[문헌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