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종암(朝宗巖)은 경기도기념물 제28호로 소재지는 경기도 가평군 하면 대보간선로 399이다.
조종암은 좁은 의미로는 숭명배청을 의미하는 25자를 새겨놓은 암벽과 비석, 즉 조종암기실비(朝宗巖紀實碑)를 말하고, 넓은 의미로는 이곳과 아울러 200m 떨어진 곳에 위치하는 대통행묘 (大統行廟) 및 그 부속건물까지를 포함한다.
조종암이 만들어진 것은 1684년(숙종 10) 가평군수 이제두(李齊杜)와 처사 허격(許格), 백해명(白海明) 등에 의해서였다. 이들은 망한 명나라를 추모하고 청나라를 적대시한다는 존명반 청론과 대명의리론에 입각하여 암벽에 숭명배청의 의미를 담은 글자를 새겨 넣었다. 이로 인해 조종암이란 명칭과 유적이 생겨났다.
조종암을 이곳에 세운 연유는 바로 앞에 흐르는 조종천에 있다. S자 형으로 여러 번 굽이치는 조종천은 강물이 여러 번 굽이쳐도 반드시 동쪽으로 흘러가기 마련인 것처럼 명나라의 유교문화전통을 수호하려는 충성심도 변함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특별한 뜻을 지녔기에 바로 이곳 가평군 대보리에서 조종암이 탄생하였다.
이때 새겨진 글자는 사무사(思無邪), 만절필동재조번방(萬折必東再 造藩邦), 일모도원지통재심(日暮道遠至痛在心), 조종암(朝宗巖) 등 22자인데, 뒷날 견심정(見心亭)이란 세 글자가 추가로 새겨졌다. ‘사무사(思無邪)’는 지면에서 가장 높은 바위 위에 세로로 새겨져 있다. ‘생각할 때는 어떤 사악함도 없도록 하라’는 뜻으로 『시경』과 『논어』에 나오는 말이다. 김상헌(金尙憲)이 청나라 심양에 잡혀 있을 때 입수한 명나라 의종(毅宗)의 어필이다. 이 말은 이이(李珥)가 『격몽요결(擊蒙要訣)』에서 말한 이후 노론계 재야 유학자들이 평생 수양해야 할 경구로 인식하였다. ‘만절필동(萬折必東)’은 선조가 조선을 구원해준 명나라의 은혜에 감사하며 올린 상소문에 나오는 말로 선조의 어필이다. 물결이 만 번 굽이쳐도 반드시 동쪽으로 흘러간다는 말이다. ‘재조번방(再造藩邦)’은 조종암 석벽의 중앙에 위치한다. 명나라가 번방인 조선을 다시 세워 주었다는 의미로 명의 은혜에 감사하는 말이다. 선조는 이 글을 임진왜란 때 명나라 원군을 추모하는 사당인 선무사(宣武祠)에 걸어두었다고 한다. ‘일모도원지통재심(日暮途遠至痛在心)’은 ‘사무사’가 새겨져있는 아래 부분 왼쪽에 세로로 새겨진 글이다. ‘날은 저물고 갈 길은 먼데 지극한 아픔이 가슴 속에 남아 있다.’는 뜻으로 효종 임금이 척화대신 이경여(李敬輿)에게 내린 비사를 송시열(宋時烈)의 글씨로 새긴 것이다. 이것은 병자호란의 치욕을 씻기 위해 북벌을 단행하고자 하나 제반여건이 여의치 못함을 통탄한 말이다.
‘조종암(朝宗巖)’은 바위에 가로로 ˙宗朝’라 새겨져 있다. 이 글자 외에는 모두 세로로 새겨져 있다. 선조의 손자인 낭선군 이우(李)의 글씨이다. 이상의 글씨는 모두 1684년 새겨진 것들이다. ‘견심정(見心亭)’은 이항로(李恒老)가 조종암에 정자를 세우려다 뜻을 이루지 못하자 그의 제자 유중교가 1874년에 다시 정자를 지으려 하며 바위 옆에 새긴 글씨이다. ‘견심’은 『주역』에 나오는 문구로 현재의 위기상황을 염려하면서도 사라져버린 강한 기운은 반드시 되돌아온다는 낙관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즉 명나라의 멸망으로 천하가 오랑캐의 지배에 들어가고 또 서양의 문명이 범람하는 유교문화의 위기존망의 상황은 자연현상이 순환되는 것처럼 반드시 역전되리라는 믿음이 이 속에 숨겨져 있다.
조종암이 만들어진 이후 바위 밑에 작은 단을 세워 명나라 의종의 탄일과 기일마다 배향하였다. 이들의 중화사상과 이민족 배척의식은 이 후 이곳이 위정척사사상의 고향과 같은 곳이 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그 뒤 1804년(순조 4) 왕명에 의해 조종암의 역사를 기록한 조종암기실비가 세워졌다. 1875년에는 이항로의 문인인 김영록에 의해 『조종암지(朝宗巖誌)』가 완성되었다.
한편 1644년 명나라가 멸망하자 그 부흥운동을 꾀하다가 실패한 인사들 9명이 조선으로 망명하였다. 이들 구의사(九義士)의 후손들이 이 곳으로 이주하여 가평의 유림들과 뜻을 모아 조종암 근처에 새로 제단을 만들었다. 이를 대통행묘와 구의행사(九義行祠)라 칭하고 매년 명나라 태조와 구의사에게 제사를 지냈다. 당시 그 단 아래에는 열천재(冽泉齋)라 하여 후손들이 기거하면서 제사를 모시다가 1863년 재실이 소실되자 다시 재건하여 조종재(朝宗齋)라 하였다.
조종암은 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뒤에도 비밀리에 제향을 계속하다가 1934년 일시적으로 제사가 중단되기도 하였다. 그 후 구의사 후손들을 중심으로 재건이 추진되어 1958년 제향이 재개되고 1977년 조종재가, 1979년 대통행묘가 각각 건립되었다.
(자료출처 : 경기문화포털)
『경기문화재총람-도지정편(1~3)』
『경기문화재대관-도지정편』
『(경기도 역사와 문화) 백문백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