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선생묘(李準先生墓)는 경기도기념물 제120호로 소재지는 경기도 양주시 남면 감악산로 482-13이다.
조선 중기의 문신 이준(1545∼1624)의 묘지이다. 이준은 선조 원년(1568)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한 뒤 주서(注書) · 정언(正言) · 헌납(獻納)을 거쳐 진주목사(牧使)·의주목사를 역임하였다. 선조 22년(1589) 정여립(鄭汝立 : 1546~1589)의 모반 사건이 일어나자 도승지(都承旨 )로서 죄인을 다스리는 데 공을 세워 평난공신(平難功臣) 2등에 책록되고 전성군(全城君)에 봉해졌다. 임진왜란(1592~1598)이 일어나자 운향사(運餉使)가 되어 명나라 군사의 군량미 조달 책임을 맡았으나 병으로 은퇴하였다. 그 뒤 한성부좌윤(漢城府左尹) · 춘천부사(府使)를 거쳐 예조 · 병조의 참판(參判)을 지내고 선조 33년(1600) 대사간(大司諫)이 되었으나 북인(北人) 홍여순(洪汝諄 : 1547~1609)의 일파로 몰려 한때 파직되었다. 그 뒤 안동부사·경주부윤(府尹) 등의 지방관을 거쳐 광해군(光海君) 때 좌참찬(左參贊)·형조판서(判書)·공조판서 등을 역임하고 광해군 7년(1615) 개성부유수(留守)기 되었다. 이조판서에 이르렀으나 계축옥사(癸丑獄事 : 1613)가 일어나고 인목대비(仁穆大妃 : 1584~1632) 유폐 사건(1618) 등 정사가 어지럽자 벼슬을 버리고 은퇴하였다.
묘는 남면중학교 앞에 있는 도로 왼편의 성창화성 공장의 담장을 따라 난 샛길로 약 400m쯤 올라간 지점에 위치한다. 부인의 것과 쌍분으로 되어있는 묘 앞에는 신, 구 묘비가 2기 있고 상석, 향로석 및 동자석, 문인석, 망주석 각 2기가 좌우대칭으로 배치되어 있다. 묘는 백색 화강암의 장대석 9매를 이용하여 원형의 호석을 둘렀으며, 크기는 높이 190cm이다.
묘 앞에 있는 원래의 비는 비좌와 비신을 갖추고 있는데, 비좌는 백색 화강암에 복련문과 당초문이 양각되어 있다. 비신은 청색의 결이 있는 유백색 대리석 재질이며 전면에 탄흔에 의한 훼손이 심하다.
묘갈은 묘역 입구의 시멘트 블록 담장 내에 남향하여 안치되어 있다. 비좌와 비신 및 옥개석을 갖추고 있는데 비좌는 백색 장방형 화강암이다. 비신은 백색의 대리석인데 전체에 비문이 있으며 글자가 뚜렷하고 상태도 양호하다. 옥개석은 팔작지붕의 형태를 띠고 있다. 묘갈은 현종 13년(1672)에 건립되었다.
사당은 태극문양이 그려진 홍살문의 솟을 대문 안에 있으며, 내부에는 문화재자료 제2호로 지정되어 있는 선생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형식의 민도리양식 건축물이다.
(자료출처 : 양주시청 및 『경기문화재총람-도지정편2』, 경기도, 2005)
『경기문화재총람-도지정편(1~3)』
『양주시』
『양주군의 역사와 문화유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