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실장군묘(李房實將軍墓)는 경기도기념물 제52호로 소재지는 경기도 가평군 가평읍 하색리 산81번지이다.
고려의 무신으로 홍건적(紅巾賊)을 격퇴하는 데 큰 공을 세운 이방실(?~1362) 장군을 모신 유택이다. 묘역은 사성((沙城)으로 둘러싸였고 단분으로 진양부인(晋陽夫人) 진주강씨(晋州姜氏)와 정부인(貞夫人) 영산신씨(靈山辛氏)와의 합장묘이다.
이 모역은 1978년 봉분을 둘러 싼 호석·상석·향로석·문인석 등의 모든 석물(石物)을 새로이 제작하여 원래의 모습에서 많이 변하였다. 봉분 우측의 묘비는 국한문혼용(國漢文混用)으로 고려원수충렬공이방실지묘(高麗元帥忠烈公李芳實之墓)』라 쓰였는데, 철학박사 이을호가 찬(撰)하고, 김창동이 썼다.
(자료출처 : 가평군청 / 『경기문화재총람-도지정편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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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실(李芳實, ?~1362)
이방실(李芳實)장군은 서기 1298년(고려 충열왕 24년) 함안 생동산 기슭에서 고려摠郞(총랑)을 지내던 이원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힘이 세고, 용모가 출중했으며, 용맹스러웠다고 전해 오고는 있으나 생후 42년간의 행적에 문헌기록이 없어 자세한 내용을 고찰할 수 없음이 안타깝다.
1346년 즉 42세되던 해에 태자 혼(昕)(이 분이 후에 충목왕이 됨)이 볼모가 되어 원(元)나라에 갔을 때 극진히 모셨던 공로로 中郞將(중랑장)의 보직을 받았고, 충목왕 4년(서기 1348년)에 정四품의 호 군(頀軍)으로 승진되면서부터 훌륭한 장군으로서의 면모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으로 보아 출세가도가 늦은 감이 없지 않다.
1350년(충정왕 2년)에 대호군으로 승진하니 이는 정三품의 무관적으로서는 두 번째가는 고위장성급이 었다. 1354년(공민왕 3년) 12월에 선성에서 다루가치(達魯花赤) 노연상(魯連祥)이 반란을 일으키자 이 방실은 대호군의 자격으로서 용주의 군사를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너 노연상의 집으로 처들어가 그들 부자의 목을 베어 서울로 보냈는데 이것이 이방실 장군의 최초의 훈공이라고 여겨진다.
1359년(공민왕 8년) 12월 홍건적(紅巾賊)의 괴수 모거경(毛居敬)이 4만여명의 홍건적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 침입해 오는 대사건(戰亂)이 일어났는데 이때 이방실 장군은 안우·이음·이인우 등과 함께 적을 격퇴하여 추성협보공신에 봉해지고, 추밀원부사가 되었다.
이 추밀원은 국왕의 명령을 결재하고, 또 궁중의 경비를 맡아보던 기관이었다. 그 후 홍건적이 또다시 군사를 이끌고 배 70여적을 동원하여 서해도에 침입해 왔는데 이때 이방실은 이를 무찌른 공로로 공민왕은 친히 차고 있던 옥대를 풀어 하사 하니 이는 최고의 영광이었다.
1361년(공민왕 10년) 10월 도지휘사로 승진하여 명실공히 최고의 장군이 되었으나 이해 겨울에 반 성·사유·관선생 등이 또다시 20만의 홍건적을 이끌고, 침입해 오자 병마절도사 김득배와 함께 재천·영변·박천 등지에서 적을 요격했으나 안주·절령에서 참패하여 끝내 재경(開京)까지 함락당하는 곤경에 빠지고 말았다.
그러나 그 이듬해에 이방실은 서북면 도지휘사가 되어 흩어진 군사를 재정비하고, 총병관 정세운·안우·김득배·안우경·최영 장군과 함께 20여만의 대군으로 서울을 포위하여, 적을 섬 멸하고, 잔당들을 압록강 밖으로 격퇴시켰는데 이는 고려 역사상 미증유의 대전과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공민왕은 이 전란을 성공으로 이끈 이방실 장군에게 장군으로서는 하기 어려운 중서평장정사(정二품)란 큰 벼슬을 내렸다.
그러나 고려 삼원수(三元帥)라는 이름을 얻은 이방실·김득배·안우등이 대공을 세우자 평소부터 이를 시기하던 김용의 흉계로 인하여 안우·김득배와 함께 살해되고 말았다.
구국의 영웅 이방실은 이렇게 억울한 죽음을 당했지만 후세 역사는 무심치 않아 고려 공양왕 당시 중랑장을 지내던 방사량이 임금께 상소하여 이방실의 시호를 충열이라 하게 되었으며, 이조 문종 2년에 이 삼원수를 숭의전에 배향(配享)하였다. 묘는 가평군 가평읍 하색리 진동에 있다.
『경기문화재대관-도지정편』
『경기인물지-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