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한씨문익공파묘역(淸州韓氏文翼公派墓域)은 경기도기념물 제163호로 소재지는 경기도 시흥시 군자로335번길 36-11(거모동 산62-4번지)이다.
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인조(仁祖)의 장인인 한준겸(韓浚謙 : 1557~1627)을 모신 유택이다. 한준겸의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익지(益之), 호는 유천(柳川)이다. 1586년(선조 19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하여 주요 관직으로는 1598년에 우승지(右承旨), 경기도관찰사, 대사성(大司成)을 역임하고, 1599년 경상도관찰사, 1603년 부제학(副提學)을 거쳐 1605년 호조판서가 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딸이 인열왕후(仁烈王后 : 1594~1635)로 책봉되자 영돈령부사(領敦寧府事)로 서원부원군(西原府院君)에 봉해졌다. 1624년(인조 2년)에 이괄의 난에 왕을 공주(公州)에 호종하였으며, 1627년 정묘호란(丁卯胡亂)에는 세자를 전주(全州)에 시종하였다. 시호는 문익(文翼)이다.
본 묘역은 한준겸 묘역을 중심으로 좌측에 그의 아들인 한회일(韓會一 : 1589~1642) 묘역과 우측에 손자인 한이성(韓以成 : 1602~1634) 묘역, 그리고 바로 앞쪽에 증손인 한두상(韓斗相 : 1627~1687)묘역이 함께 조성된 4대(代)에 걸친 묘역이다. 한준겸 묘역은 원래 강원도 원주 음지촌(陰枝村)에 있었으나 그곳의 지세가 후세에게 불리하다고 하려 아들 회일(會一)이 1636년에 이곳으로 이장해 온 것이다.
한준겸 묘역은 봉분이 단분(單墳)으로 회산부부인(檜山府夫人)황씨(黃氏)와의 합장묘이다. 석물은 묘비 1기, 상석ㆍ향로석ㆍ혼유석 각1기, 문인석ㆍ망주석ㆍ동자상 각 2기, 신도비 1기가 있다. 신도비는 1629년에 건립한 것이며 비문은 이정구(李廷龜 : 1564~1635)가 찬(撰)하고, 김상용(金尙容 : 1561~1637)이 전(篆)하고, 오준(吳竣 : 1587~1666)이 글을 쓴 것이다. 이수(螭首)ㆍ비신(碑身)ㆍ귀부(龜趺)로 이루어져 있고, 총높이 335cm의 대형이다. 장대한 귀부에 푸른 빛이 감도는 대리석 비신과 생동감이 넘치는 이수의 조각, 안정감 있는 비례감각 등 조선 전기의 양식을 충실히 따른 훌륭한 작품이다.
한편 이 신도비는 한준겸의 묘역에서 동남쪽으로 약 200m 떨어져 있었으나 서해안 고속도로의 건설로 인해 1994년 현 위치로 옮겨져 왔다. 또한 기록에 의하면 신도비의 비각(碑閣)은 영조(英祖)의 명을 받아 1769년에 세웠는데 현재의 위치로 옮겨오기 전까지는 신도비 주위에 정면 3칸, 측면 3칸으로 구획된 장초석(長礎石)이 있었는데 비각을 복원하면서 이 장초석을 이용하지 않고 새로운 석재를 사용하여 복원하였다.
한회일 묘는 정부인 전주 이씨와 합장이며, 석물은 묘표ㆍ상석ㆍ향로석 각 1기와 문인석 1쌍이 있다. 인조 23년(1645)에 세운 묘표의 비문은 신익성이 짓고 글씨는 오준이 썼다.
한이성 묘는 유인(孺人) 죽산 안씨와 합장이며, 석물은 묘표ㆍ상석ㆍ향로석 각 1기, 동자석ㆍ망주석 각 1쌍이 있다. 문인석을 사용하지 않고 거대한 동자석을 사용한 것은 공이 벼슬을 하지 못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묘표는 숙종 27년(1701)에 세운 것으로 비문의 글씨는 한종노가 썼다.
한두상 묘는 숙인(淑人) 양주 조씨와 합장이며, 석물은 묘표ㆍ상석ㆍ향로석 각 1기, 문인석ㆍ망주석 각 1쌍이 있다. 묘표의 비문은 이봉휘가 짓고 글씨는 한종노가 썼다.
(자료출처 : 시흥시청 및 『경기문화재총람-도지정편』, 경기도, 2005)
『경기문화재총람-도지정편(1~3)』
『시흥문화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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