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양주 광해군묘(南楊州 光海君墓)는 사적 제363호로 소재지는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송능리 산59번지이다.
조선 제15대 임금인 광해군(光海君 : 1575~1641)과 문성군부인 유씨(文城郡夫人柳氏)의 묘역이다. 광해군은 선조의 둘째 아들로 후궁 공빈 김씨의 소생이며, 이름은 혼(琿)이다. 의인왕후 박씨가 소생이 없자, 선조는 적자가 없어 세자책봉을 미루고 있었으나 춘추 40세를 넘기며 마냥 미룰 수 없고, 임진왜란으로 피신하면서 평양성에 머무를 때 분조(分朝 : 비상사태로 임시로조정을 분리하는일)해야할 상황에 이르러 대신들의 주청을 받아들여 1592년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했다.
본래는 맏아들인 임해군이 세자가 되어야 했지만 성질이 난폭해 군왕의 기질이 없다 하여 둘째 광해군이 세자로 책봉되었다. 후에 인목왕후가 계비가 되고, 영창대군이 태어나자 선조는 광해군을 폐하고 적자인 영창대군을 세자로 책봉하려고 생각하였으나 지병이 악화돼 서거함으로써 뜻을 이루지 못했다.
광해군은 1608년 2월 재위를 향한 우여곡절과 긴 여정 끝에 34세에 왕위에 올랐다. 재위 중에는 임진왜란으로 황폐해진 나라를 회복하는데 힘썼고 또 동북아의 국제정세가 급변하는 과정에서 표면적으로는 명나라와 협력하는 체하면서 세력이 큰 후금에게는 명의 강요 때문에 출병했다며 그들과 우호를 다지겠다는 양면계책을 쓰는 등거리 실리외교를 펼쳐 나라를 지켰다. 한편 후금의 침략에 대비해 대포를 주조하고 국방을 강화하는 등 실리적 정치관을 펼쳤다.
왕권강화와 민생안정책을 펴 당쟁 종식과 정치적 안정에 노력하여 1608년 선혜청을 설치하고 경기도에 대동법을 실시하였으며 1611년에 양전을 실시하여 국가의 재원 확보하고 전화로 손실된 경희궁,인경궁 등을 중건하였고, 서적간행에 박차를 가하는 등 문화면에서도 훌륭한 치적을 많이 남겼다. 이 때 전화로 손실된『신증동국여지승람』, 『용비어천가』, 『동국신속삼강행실』 등을 다시 간행하고, 『국조보감』을 재편찬하여 정사운영의 방향을 확립했고,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네 곳의 사고(史庫)를 대신해 적산산성에 사고를 설치했다.
한편 이 시대에는 허균의 『홍길동전』, 허준의 『동의보감』이 나와 문학과 의학부분에 획기적인 발전을 이뤘다. 그러나 광해군의 실리적이고 과단성 있는 정책은 인정반정으로 중단되었다. 왕권강화를 위한 과정에서 임해군과 영창대군을 역모로 몰아 죽이는 등 많은 인명을 살상하였고 인목대비를 서궁에 유폐시키는 등 패륜행위를 일삼았다는 반정의 명분을 제공하여 이귀, 김자점, 김류, 이괄 등 서인 세력들에 의한 인조반정으로 폐위되었다.
그는 폐위된 후 강화를 거쳐 제주도에서 18년간의 유배생활을 하다가 1641년(인조 19) 춘추 67세로 서거(逝去)하였는데 초연한 자세로 유배생활을 보냈다고 전해지고 있다. 묘역이 이 곳 송능리에 안치되 것은 광해군이 죽기 전에 “자신을 어머니 묘 발치에 묻어달라”고 유명하여 조정에서 공빈김씨가 묻힌 성묘 아래쪽 오른편 능선에 장사지냈다. 부인 류씨는 인조반정으로 폐출되어 1623년(인조 1) 유배지인 강화에서 서거하였다. 묘역은 곡장 안으로 문성군부인 류씨와 쌍분으로 남향하고 있는데 왼쪽이 광해군, 오른쪽이 부인의 묘이다. 폐위되어 군의 장례(葬禮)에 준하였기 때문에 간소하게 조성되었다.
(자료출처 : 남양주시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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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내용 출처 : 문화재청
능, 원, 묘의 구분
왕족의 무덤은 왕실의 위계에 따라 능, 원, 묘로 분류된다.
1. 능(陵) : 추존왕, 추존왕비를 포함한 왕과 왕비의 무덤
2. 원(園) : 왕세자와 왕세자비, 그리고 왕의 사친(私親 : 종실로서 임금의 자리에 오른 임금의 생가 어버이)의 무덤
3. 묘(墓) : 나머지 왕족, 즉 왕의 정궁의 아들, 딸인 대군과 공주, 왕의 서자, 서녀인 군과 옹주, 왕의 첩인 후궁, 귀인 등의 무덤
『경기문화재대관-국가지정편』
『문화재안내문안집. 1』
『(푸른 숲, 맑은 물)남양주시-문화관광 길잡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