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약용선생묘(丁若鏞先生墓)는 경기도기념물 제7호로 소재지는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다산로747번길이다.
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실학의 대가였던 다산(茶山) 정약용(1762∼1836) 선생의 묘소이다. 정약용은 조선 영조(英祖) 38년(1762) 경기도 광주에서 출생하였다. 16세에 이미 성호(星浩) 이익(李瀷, 1681~1763)의 학문에 접하면서 민생을 위한 경세(經世)의 학문에 뜻을 두고 이후 당시의 새로운 학문인 서학(西學)에 흥미를 가졌다. 정조(正租) 13년(1789)에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였고, 정조 16년(1792)에 홍문관수찬(弘文館修撰)이 되어 축조 계획 중이었던 화성(華城)의 성제(城制)를 작성하였다. 또한 거중기를 제작하여 화성 축조의 공정을 단축시키는데 크게 공헌하였다. 정조 18년(1794) 경기도암행어사를 거쳐 정조 19년(1795) 병조참의(兵曹參議)가 되었는데 주문모(周文謨) 신부가 체포되자 형 정약전(丁若銓)과 이 사건에 연관되어 충청도 금정찰방으로 좌천되었다. 순조(純祖) 원년(1801) 신유박해(辛酉迫害) 때 경북 포항 장기로 유배된 뒤에 다시 전남 강진으로 옮겨졌다. 18년의 유배 동안 경서학(經書學)에 전념, 실학의 대가가 되어 『목민심서(牧民心書)』, 『경세유표(經世遺表)』등 다수의 책을 저술하여 정치·경제 등 제도의 개혁을 주장하였다.
봉분은 단분이며 숙부인(淑夫人) 풍산홍씨(豐山洪氏)와의 합장묘(合葬墓)이다. 묘소에는 묘비, 상석, 향로석, 망주석 1쌍이 설치되어 있고, 후에 곡담과 묘비 1기가 추가되었다. 묘비는 팔작지붕형 가첨석(加檐石), 오석제 비신(烏石製碑身), 기대(基臺)로 구성된 전형적인 조선 후기의 양식이다.
(자료출처 : 『경기문화재총람-도지정편2』)
『경기문화재대관-도지정편』
『남양주문화재대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