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원(흥선대원왕)〔興園(興宣大院王)〕은 경기도기념물 제48호로 소재지는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창현리 산22-2번지이다.
고종의 아버지 흥선대원군 이하응(1820∼1898)의 묘이다. 그는 영조(英祖)의 현손이며 남연군(南延君, ?~1822)의 아들로 헌종 9년(1843) 흥선군에 봉해지고 그 후 한직을 역임하면서 안동김씨(安東金氏)의 세도 정치 밑에서 불우하게 지냈다. 1863년 철종이 승하하고 신정왕후(神貞王后, 1808~1890)에 의해 고종이 즉위하자 대원군에 건봉되었고 이어 대왕대비의 수렴청정이 선포되자 섭정을 맡았다. 안동김씨의 주류를 숙청하는 한편 당색을 초월하여 인재를 등용, 47개 사원을 제외한 나머지 서원을 철폐하며 국가 재정 낭비와 당쟁의 요인을 없애 중앙 집권적 정치 기강을 수립했다.
그러나 경복궁을 중건하여 백성들의 생활고가 가중되고, 쇄국 정책을 고집하여 외래 문명의 수용이 뒤늦게 되었다. 그의 섭정 10년동안 반대 세력이 형성되어, 며느리 명성황후(明成皇后, 1642~1683)가 반대파를 포섭하고 고종 10년(1873) 그의 실정(失政)이 최익현(崔益鉉, 1833~1906)에 의해 탄핵받았다. 그리고 고종이 친정(親政)을 선포하자 은퇴하였다. 이때부터 재집권을 노리던 중 고종 19년(1882) 임오군란으로 정권을 다시 잡고 행방불명된 명성황후의 죽음을 선포했으나, 명성황후의 책동으로 출동한 청나라 군사에 납치되어 청나라 텐진(天津)에 4년 간 유폐되었다. 고종 22년(1885) 귀국하여 운현궁에서 재기를 노리던 중 원세개(袁世凱)와 협력하여 장남 이재황을 옹립하려다 실패했다. 고종 32년(1895) 재집권을 위해 일본공사 미우라(三浦梧樓)와 결탁 을미사변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하였다.
흥원(흥선대원왕)〔興園(興宣大院王)〕은 고양군 공덕리에 모셨다가 1906년 파주군 대덕리로 옮겼으며 1966년 4월에 현재의 위치로 다시 옮겼다. 묘 주위에는 돌담이 둘러져 있고, 묘역은 2단으로 나누어 만들었다. 상단에는 둘레석을 두른 봉분과 제물을 올려 제사를 지내기 위한 상석이 있고, 하단에는 멀리서도 무덤이 있음을 알 수 있게 해주는 망주석(望柱石)과 문인석 등의 석물이 갖추어져 있다.
(자료출처 : 문화재청 / 『경기문화재총람-도지정편2』)
내용 더보기
※ 아래내용 출처 : 문화재청
능, 원, 묘의 구분
왕족의 무덤은 왕실의 위계에 따라 능, 원, 묘로 분류된다.
1. 능(陵) : 추존왕, 추존왕비를 포함한 왕과 왕비의 무덤
2. 원(園) : 왕세자와 왕세자비, 그리고 왕의 사친(私親 : 종실로서 임금의 자리에 오른 임금의 생가 어버이)의 무덤
3. 묘(墓) : 나머지 왕족, 즉 왕의 정궁의 아들, 딸인 대군과 공주, 왕의 서자, 서녀인 군과 옹주, 왕의 첩인 후궁, 귀인 등의 무덤
『경기문화재대관-도지정편』
『남양주문화재대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