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렬공박원종묘역(忠烈公朴元宗墓域)은 경기도기념물 제170호로 소재지는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 안골로25번길 9-13이다.
조선 전기의 무신으로 중종반정(中宗反正)의 1등 공신인 박원종(朴元宗, 1467~1510)를 모신 유택이다. 박원종의 본관은 순천(順天), 자는 백윤(伯胤)이다. 공신의 집안에서 태어나 음보(蔭譜)로 선전관(宣傳官)이 된 후 1468년(성종 17년) 무과(武科)에 급제하면서 성종의 특별한 관심을 받으면서 공조참의, 병조참지를 역임하였다. 그 뒤 연산군이 즉위하여 특명으로 동부승지 · 우승지 · 좌승지를 역임하면서 주로 재정을 담당하던 중 왕실의 사치행각을 비판하는 간언 등으로 점차 연산군의 미움을 받아 1500년(연산군 6년)에 평안도병마절도사로 좌천되었다. 다시 복직되어 여러 관직을 거친 후 1506년 경기도관찰사로 나갔다가 연산군의 미움을 받아 삭직되었다. 마침내 1506년 이조참판 성희안, 이조판서 유순정 등과 함께 반정(反正)을 모의하여 연산군을 폐하고 중종(中宗)을 옹립하였다. 그 공으로 정국공신(靖國功臣) 1등으로 우의정이 되었고, 평원부원군(平原府院君)으로 진봉되었다. 좌의정을 거쳐 1507년 이과(李顆, 11475~1507)의 옥사(獄詞)를 다스린 공으로 정난공신(靖難功臣) 1등에 봉해졌다. 이듬해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다녀온 후 1509년(중종 4년)에 영의정에 오르고 평성부원군(平城府院君)에 봉해졌다. 중종의 묘정에 배향되었고, 시호는 무열(武烈)이다.
박원종 묘역의 봉분은 단분으로 합장이 아닌 단독장(單獨葬)이다. 석물로는 묘비1기, 상석·향로석 각 1기, 장명등 1기, 망주석 2기, 문인석 2기 및 계체석 등이 있다. 그리고 묘역의 전방 아래에는 신도비 1기가 세워져 있다. 석물은 그 시대의 다른 묘역보다 대형으로 예술적으로도 전반적으로 수작(秀作)이다. 특히 문인석은 높이 245cm로 규모가 크고 중량감이 있으면서도 전체적인 비례가 안정적이며, 안면의 표현에 있어서도 매우 사실적이다. 형태는 복두(幞頭)에 공복(公服)을 입고 홀(笏)을 들고 있는 형상인데 복두의 끈이 목 부분에서 매듭을 하고 있어 복두의 착용방법을 알 수 있고, 공복의 의습선과 후수(後綬) 등의 조각 기법도 정교하고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신도비는 이수(螭首)·비신(碑身)·비좌(碑座)로 구성되어 있다. 이수에는 두 마리의 이무기가 여의주를 다투는 모양을 정교하고 생동감 있게 양각하였다. 신도비문은 홍문관 대제학을 지낸 신용개(申用漑, 1463~1519)가 찬(撰)하고 글씨를 써서 1511년(중종 6년)에 건립한 것이다.
(자료출처 : 『경기문화재총람-도지정편2』)
『남양주시의 역사와 문화유적』
『조선조 영의정 박원종 연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