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풍김씨문의공파묘역(淸風金氏文毅公波墓域)은 경기도기념물 제177호로 소재지는 경기도 남양주시 경강로399번길 24 일원이다.
청풍김씨문의공파 김식(金湜), 김육(金堉), 김좌명(金佐明), 김성응(金聖應), 김시묵(金時默)의 묘역이다. 묘역은 남양주시 삼패동 소쿠리마을 왼쪽편 산기슭에 위치하고 있다. 청풍김씨 묘역들은 위 5인의 묘역을 비롯하여 조선 중기 이후부터 이곳에 안장되어 세장지(世葬地)를 이루어 왔다. 특히 위 5인의 묘역들은 인물의 역사적 측면에서 뿐만 아니라 석물의 예술적 가치가 뛰어나다. 묘역의 석물 중 가장 예술적 가치가 뛰어난 김육과 김좌명의 신도비이다.
김식(1482~1520)은 조선 중기 문신으로 성리학자이다. 호는 사서(沙西)·정우당(淨友堂)·동천(東泉), 생원 숙필(叔弼)의 아들이며 시호는 문의(文毅)이다. 1501년(연산군 7)에 진사가 되고 이조좌랑, 장령 등을 역임하고 1509년(중종 14) 현량과에 장원급제하였으며 부제학 대사성에 올랐다. 조광조, 김안국 등과 교우하면서 도학 소장파를 이루어 유교로써 왕도정치 구현을 주장하며 제도개혁과 민중교화에 힘썼다. 그러나 개혁 의도가 급진적이었으며 과격한 정치로 기묘사화로 큰 화를 입어 선산으로 유배되기도 하였다. 후에 신사무옥에 연좌되어 다시 오지의 섬으로 유배된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거창으로 피신하다가「군신천재의(君臣千載義)」라는 시를 남기고 자결하였다. 조광조, 김정 등과 함께 기묘팔현(己卯八賢)의 한사람으로 일컬어지며 후에 영의정에 증직되었다. 양근(陽根)의 미원서원(迷原書院), 청풍(淸風)의 황강서원(凰岡書院) 그리고 거창의 완계서원(浣溪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그의 묘는 정경부인 전주 이씨와 쌍분으로 남서향하고 있으며 봉분 앞 묘표는 1659년(효종 10) 9월에 세워졌으며 김좌명이 지었다. 신도비는 묘역 아래 동남향하고 있는데 1662년(현종 3)에 세워진 것으로, 비문은 대제학 조경(趙絅)이 짓고, 김좌명(金佐明)이 쓰고 전을 하였다. 또한 묘정비(廟庭碑)가 세워져 있는데 이 비는 본래 선생이 선산으로 유배되어 갔을 때 후학들이 따라가 학문을 수련하면서 세웠던 것으로 기묘사화로 화를 당하자 땅속에 묻혔다가 근래 후손들이 발굴해 이곳에 옮겨 세웠다. 이 신도비의 머리돌에는 이무기 두마리가 구름 속에서 서로 앞발을 들어 여의주를 움켜 잡고 다투는 모습을 생동감 있게 묘사되어 있으며 푸른빛이 도는 대리석으로 된 몸돌은 파도 무늬가 나타나고 있다. 비문은 황경원(黃景源)이 짓고, 이운영(李運永)이 쓰고, 9대손 김시묵(金時)이 전을 하였다.
김육(1580~1658)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실학적 성향의 학자이며 제도개혁을 추진한 정치가이기도 하다. 호는 잠곡(潛谷)·회정당, 본관은 청풍(淸風), 참봉 흥우의 아들이며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1605년(선조 38) 사마회시(司馬回試)에 합격해 성균관에 들어갔으나 1609년(광해군 1) 동료 태학생들과 함께 김굉필, 정여립, 조광조, 이언적, 이광 등 5현(賢)을 분묘 배향하자는 상소를 올렸다가 문과 응시 자격이 박탈당하여 가평군 잠곡(청덕동)으로 은거하기도 하였다. 1623년 인조가 즉위하자 의금부도사에 임명되었으며 이듬해 음성 현감으로 있을 때 증광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정언에 임명되었다. 이후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온 후 예조참의 등을 거친 후 1638년 충청도 관찰사를 행할 때 충청도에 대동법을 적극 건의하였다. 대사간, 형조판서, 이조판서, 개성부유수 등을 거쳐 1649년 5월 효종 즉위와 함께 대사헌이 되었고 곧 우의정에 되어 경기·충청지방에 대동법을 시행하였다. 71세에 영의정이 되고 실록청총재관을 겸해 「인조실록(仁祖實錄)」을 완성했다. 중국에 수차례 다녀오면서 조선에 시헌력(時憲歷)의 제정, 수차(水車)의 제조 및 보급, 화폐(상평통보)주조와 유통에 노력 하였으며 서적 편찬 등에도 많은 업적을 남겼다. 특히 평생을 대동법 실시를 주창하였으며 그 시행으로 민폐를 덜고 국가 재정에 크게 기여하였다. 저서로 『잠곡유고(潛谷遺稿)』, 『잠곡별고(潛谷別稿)』, 『잠곡유고보유(潛谷遺稿補遺)』, 『잠곡속고(潛谷續稿)』가 전한다.
그의 묘는 정경부인(貞敬夫人) 파평 윤씨와 합장하였는데, 주위에는 곡장을 둘렀고 묘 앞에는 묘비, 상석, 향로석, 장명등 그 좌우에는 망주석, 문인석, 등이 각각 배치 되어있다. 묘비는 1659년(효종 10)에 건립되었다. 향로석은 6각의 향탁을 형상화하였고, 신도비는 장방형의 비좌와 이수를 갖추었다. 신도비의 머리돌에는 두 마리의 이무기가 여의주를 다투고 있는 형상이 생동감 있게 묘사되어 있다. 비문은 영의정 이경석(李景奭)이 글을 짓고 아들 김좌명(金佐明)이 글씨를 썼다. 1664년(현종 10)에 건립한 것으로 비문은 마모되어 전체적으로 판독하기가 어렵다.
김좌명(1616~1671)은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호는 귀계(歸溪)·귀천(歸川), 김육의 아들이며 시호는 충숙(忠肅)이다. 1633년(인조 11) 사마시를 거쳐, 1644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 사국으로 등용한 뒤 1646년 병조좌랑이 되었으며 대사헌, 경기도관찰사 도승지 등을 역임하였다. 1668년 병조판서겸 수어사 때는 군율을 바로 잡고 병기와 군량을 충실히 하는 등 매사에 공정하고 당쟁에 휘말리지 않아 신망을 얻었다. 이후 영의정에 추증되고 청릉부원군(淸陵府院君)에 추봉되었으며 현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저서로 『귀계유고(歸溪遺稿)』가 있다.
그의 묘는 부친 김육의 묘 아래 부인 평산 신씨와 합장하고 있는데 봉분 앞에는 김만주가 지은 묘표와 상석, 혼유석, 향로석 각 1기, 문인석, 망주석 각 1쌍씩이 있다. 신도비는 마을 도로변에 김육 신도비와 나란히 서 있는데 1698년(숙종 25)에 세워진 것으로 박세당(朴世堂)이 짓고, 외손 조정서가 쓰고, 김수증이 전하였다.
김성응(1699~1764)은 조선 후기의 무신으로 진사 도영(道泳)의 아들로 병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시호는 효정(孝靖)이다. 1728년(영조 4) 이인좌(李麟佐)의 난 이후 사복시내승(司僕時內乘)으로 기용, 선전관 등을 거쳐 고부군수를 역임하였다. 이후 정주목사, 경상우병사, 동부승지, 황해도수군절도사, 평안도병마절도사, 총융사, 어영대장, 병조판서, 형조판서, 판윤 등을 역임하였다. 1740년 다시 병조판서가 된 뒤 1743년 판윤, 1748년 좌포도대장, 1754년 판의금부사를 지냈으며, 20여년간 병조판서와 훈련대장을 번갈아가며 역임, 군사책임자로서 군정(軍政)을 일신하고 성지를 수축하는 등 국방강화에 노력하였다.
그의 묘는 부친 김도영의 묘 왼쪽의 산 능선에 정경부인 남양 홍씨와 합장 되어 있으며 묘비 앞에는 혼유석, 상석, 향로석, 장대석 등이 있고 좌우에 망주석을 세웠다. 영조 42년(1766)에 세워진 묘표의 머릿돌에는 발가락이 4개인 두 마리의 이무기가 구름 속에서 여의주를 잡으려는 모습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신도비는 묘역 아래 입구에 있는데 1784년(정조 8)에 세워졌으며 김원행(金元行)이 짓고, 아들 김시묵이 쓰고 전하였다.
김시묵(1722~1772)은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영돈녕부사 우명의 현손이며, 병조판서 성응의 아들이며 정조의 비인 효의왕후(孝懿王后)의 생부이다. 시호는 정익(靖翼)이다. 1741년(영조 17) 진사가 되고 1750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예문관검열·홍문관교리 등을 거쳐 1759년 대사간에 올랐다. 1762년 경기도관찰사로 있을 때 딸이 세손빈(世孫嬪)이 되자 총융사(摠戎使)에 발탁되었고, 이조·호조의 참판을 거쳐 한성부판윤 등을 지냈다. 1769년에는 병조판서로서 어영대장(御營大將)을 겸하였다. 그뒤 공조 및 호조의 판서를 거쳐, 판의금부사·선혜청당상·좌참찬 등을 역임하였다. 사망한 뒤 1776년(정조 즉위)딸이 왕비로 진봉되면서, 영의정 청원부원군(淸原府院君)에 추증되었다.
그의 묘는 삼패동 김식 묘역 인근 능선에 있는데 봉분 앞에는 혼유석과 장대석, 그 앞에 상석, 향로석을 놓고 좌우에 망주석과 문인석을 배치하였다. 봉분 좌측에는 1773년(영조 49)에 세워진 묘표가 있다.
(자료출처 : 문화재청 / 남양주시청 / 『경기문화재총람-도지정편2』)
『남양주문화재대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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