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지선생묘(李純之先生墓)는 경기도문화재자료 제54호로 소재지는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차산리 산5번지이다.
조선 전기의 문신이자 천문학자인 이순지(1406∼1465) 선생의 묘이다. 세종 9년(1427)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지내다가 세조 11년(1465)에는 판중추원사에 올랐으며, 천문·음양·풍수 등 여러 방면에 조예가 깊었다. 세종의 명으로 역법(歷法)을 연구하여 정인지·김담 등과 함께 『칠정산내외편(七政算內外篇)』을 편찬하였고, 세종 27년(1445)에 기존의 모든 천문관계 문헌을 정리하여 『제가역상집(諸家曆象集)』 4권 5책을 펴내었다. 세조 3년(1457)에는 일월식 계산법을 쉽게 만들라는 명을 받고 김석제와 함께 『산법가시(算法歌詩)』를 짓고 사용법 등을 덧붙여 『교실추보법』 2권 1책을 완성하였는데, 그의 책은 과거시험 교재로 쓰일 만큼 일반화되었다.
봉분은 단분으로 부인 영월신씨(寧越辛氏)와의 합장묘이다. 봉분 앞에는 묘비 2기가 나란히 배열되어 있는데 좌측은 그의 묘비이고, 우측은 부인의 것으로 모두 화관석(花冠石)과 비신(碑身)이 하나의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묘비 앞에는 각각 상석(床石)이 있고, 그 앞에 계체석(階砌石)이 있을 뿐이다. 신도비(神道碑)는 이수(螭首) · 비신(碑身) · 귀부(龜趺)로 구성되어 있고, 총 높이 320cm의 규모이다.
(자료출처 : 문화재청 / 『경기문화재총람-도지정편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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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내용 출처 : 경기문화포털
이순지와 세종시대의 과학
경기도 남양주의 덕소에서 86번 지방도로를 타고 수리넘이 고개를 지나 마석 쪽으로 가다보면 길섶에 오래된 묘소를 하나 발견할 수 있다. 경기도문화재 제54호로 지정되어 있는 이 묘소에는 500년의 풍상을 거친 듯 한 오래된 묘비가 서있는데, 여기에는 “判中樞端平公李純之之墓”라는 글귀가 적혀 있다. 이곳이 바로 세종시대의 과학자 이순지(李純之, 1406-1465)와 그의 부인이 합장되어 있는 묘소이다.
이순지는 어떤 학자인가? 그는 일찍이 공조참의와 호조참의, 병조판서, 중추원부사를 지낸 이맹상(李孟常1376-?)의 아들로서, 1427년(세종 9년)에 문과 을과 제2인으로 급제한 사대부 학자였다. 하지만, 그는 우연한 기회에 세종에 의해 천문역산에 재능이 있는 사람으로 발탁이 되어 세종 치세 내내, 그리고 세조 초까지 천문학 방면의 연구와 활동에 전념해야 했다. 세종시대 천문학의 발전과정에서 그가 얼마나 중요한 인물이었는지, 그리고 그의 재능이 얼마나 탁월했는지는 다음과 같은 일화를 통해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세종 18년인 1436년 겨울에 이순지는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상을 치르기 위해 업무를 출사를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세종은 그를 종5품에서 정4품으로 무려 3단계나 승급을 시키고 그의 아버지에게까지 명을 내려 상중임에도 불구하고 계속 출사하도록 명령한 것이다. 당시 이순지는 어머니의 시묘를 하며 자식으로서의 도리를 다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두 차례나 눈물로서 상소를 올리며 벼슬을 사양했지만, 세종은 이를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이와 같은 세종의 강권과 이순지의 노력으로 세종시대의 위대한 과학적 성취가 이루어졌으니,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칠정산내외편(七政算內外篇)』이다. 흔히 세종시대의 과학기술의 대표적인 성과를 꼽으라고 하면, 일반인들은 장영실(蔣英實)의 자격루를 먼저 떠올릴 것이다. 하지만, 필자와 같은 과학사 전공자들은 주저없이 이순지와 김담(金淡, 1416-1464)에 의해 1442(세종 24)에 편찬된 『칠정산내외편(七政算內外篇)』을 수위로 꼽을 것이다. 여기서 ‘칠정(七政)이란 해와 달과 다섯 개의 행성을 합친 ’일곱 개의 천체‘를 의미하고, ‘칠정산’이란 이들 ‘일곱 개의 천체’의 운행궤도를 계산하는 방법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칠정산내외편』은 오늘날의 천체물리학에 해당하는 내용을 다루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칠정산내외편』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 책일까? 세종시대에 이르면 조선의 정부는 중국으로부터 역서를 수입하여 사용하는 문제를 인식하고 독자적인 천체운동 계산능력을 길러서 조선 나름의 역서를 간행하려는 노력을 강화한다. 이를 위해 세종과 과학자들은 중국으로부터 여러 천문학 서적들을 수입하여 연구하고, 관련된 천문관측 기구들인 혼천의(渾天儀)와 간의(簡儀) 등을 제작하여 천체를 관측하기도 하였다. 그 결과 마침내 독자적인 역법(曆法)을 완성할 수 있게 되었으니, 『칠정산내외편』이 바로 그것이다. 『칠정산내외편』의 편찬은 단지 역법의 독립만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최초로 전문적인 수준의 과학기술 연구능력을 보유하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이후 20세기 초까지 조선은 독자적인 역법계산과 역서의 발행을 계속하였으니, 이는 『칠정산내외편』으로 상징되는 ‘천문학 독립’과 그 중심에 이순지가 서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현재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는 세종시대의 과학과 관련된 문헌들이 수십 책 이상 소장되어 있는데, 이들 중에는 1434년에 주조된 초주 갑인자(初鑄 甲寅字)로 인쇄된 천문학과 관련된 서적들도 상당수 포함되어 있어 현재 규장각에서도 이들을 귀중본으로 지정하여 별도로 관리하고 있다. 그런데 그 목록을 살펴보면 세종시대에 간행된 귀중본 과학기술 서적들은 대부분 이순지라는 과학자 단독 저작이거나 아니면 그가 포함된 공저의 형식으로 편찬된 것이다. 『교식통궤』, 『중수대명력』, 『위도태양통경』, 『수시력첩법입성』등이 그것으로 이들 귀중본 서적들은 『칠정산내외편』의 성립과정에서 수입되거나 편찬된 서적이다. 뿐만 아니라, 혼천의(渾天儀)와 간의(簡儀), 혼상(渾象), 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와 같은 천문관측 기구와 더불어 장영실이 만든 자동 물시계인 자격루도 천체 관측에 필요한 정확한 시각을 계산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순지는 그가 남긴 업적에 비해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 얼마 전 고액권 화폐의 인물을 선정할 때 장영실이 10인의 인물후보군에 포함되었다. 또한 그가 만든 자격루 유물(엄밀히 말하면 물시계 유물이다) 그림은 구 1만원권 화폐의 뒷면을 장식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장영실은 조선시대 과학기술자들을 대표하는 인물처럼 취급되고 있으며, 일반인들에 의해 융숭한 대접을 받고 있다. 이에 비해, 이순지는 그 업적을 생각해보건대 거의 찬밥신세와 같은 대접을 받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대접의 불공평성’은 사실 일반인들의 세종시대 과학기술에 대한 ‘이해의 부정확성’이나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다. 불행 중 다행인지 모르겠지만, 남양주에 있는 그의 묘소는 세간의 무관심 덕분인지 고적한 풍취를 아직까지 간직하고 있어 그를 알지 못하는 길손들조차도 발길을 닿게 하고 있다.
『경기문화재대관-도지정편』
『남양주문화재대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