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난종선생묘및신도비외묘역일원(鄭蘭宗先生墓및神道碑外墓域一圓)은 경기도기념물 제115호로 소재지는 경기도 군포시 속달동 산3번지이다.
조선 전기의 문신 허백당 정난종(1433∼1489) 선생과 그의 두 아들 광보(1457∼1524), 광필(1462∼1538)의 묘지이다. 묘역은 견불산(見佛山, 일명 수리산)을 후산(後山)으로 하여 동남향 하단 능선에 위치하고 있다. 능선 하단부 중앙에 정난종(1433~1489)의 묘소가 있고 그 후면 위로 그의 장남 광보(1457~1524)와 차남 광필(1462~1538)의 묘소가 차례로 있다.
정난종은 세조 2년(1456)에 과거에 급제한 후 여러 관직을 거쳤으며, 1467년에는 황해도 관찰사로 있으면서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워 호조참판에 올랐다. 사신으로 여러 차례 명나라에 다녀오기도 했던 그는 훈구파의 중진인사로 성리학에 밝았으며, 특히 서예에 일가견이 있었고 글씨도 잘 썼다. 정광필은 성종 23년(1492) 과거에 급제한 후 성균관에 있으면서『성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했으며, 중종 5년(1510) 전라도 순찰사가 되어 삼포왜란을 수습하고 병조판서에 올랐다.
정난종선생의 봉분은 부인 완산이씨(完山李氏)와의 합장묘로 쌍분이다. 봉분 앞에는 각각 화관석(花冠石) 묘비가 위치하고 있는데, 건립 연대는 좌측 그의 묘비가 조선 성종(成宗) 20년(1489), 우측 부인의 묘비가 성종17년이다. 쌍분의 중앙 앞에는 상석이 있고, 그 앞에 장명등이 있다. 장명등을 중심으로 좌우에는 대형·소형의 문인석 2쌍이 배열 되어 있다. 신도비는 묘역 좌측 아래에 위치하고 있는데 이수(螭首)·비신(碑身)·기대(基臺)·대좌(臺座)로 구성되어 있다. 이수는 두 마리의 용이 여의주를 다투는 형상이며 그 밑으로 운문(雲門)이 장식되었고 전체적인 비의 조각 수법이 매우 사실적이다. 비문은 남곤(南袞 : 1471~1527)이 찬(撰)하여 중종(中宗) 20년(1525)에 건립한 것이다.
정광보선생의 봉분은 부인 전의이씨(全義李氏)와의 합장묘로 쌍분이다. 쌍분의 중앙 앞에 묘비·상석·향로석이 있고, 상석 바로 좌우에는 동자상(童子象)이 있으며, 상석 전방에는 장명등이 위치하고 있다. 장명등을 중심으로 좌우에는 망주석과 문인석이 1쌍씩 배열되어 있다. 묘비는 이수와 비신이 하나의 대리석으로 되어 있어 기대에 꽂아 세우는 구조이며, 이수에는 두 마리의 용이 조각되어 있다. 건립 연대는 중종 19년(1524)이다. 묘소 좌측 아래에는 묘갈(墓碣)이 세워져 있는데 2단의 대좌를 만들고, 그 위에 귀부(龜趺)를 놓고 비신과 이수를 얹어 놓은 형식이다. 이수 역시 두 마리의 용이 여의주를 다투는 형상으로 그 문양이 섬세하다. 비문은 이행(李荇 : 1478~1534)이 찬하여 중종20년(1525)에 건립한 것이다.
정광필선생의 봉분은 부인 은율송씨(恩律宋氏)와의 합장묘료 쌍분이다. 봉분 앞에는 각각 이수·비신·기대의 구조를 갖춘 묘비가 있고, 쌍분의 중앙 앞에는 상석이 놓여 있다. 상석의 전방에는 장명등이 세워져 있고, 장명등을 중심으로 좌우에는 망주석과 문인석이 1쌍씩 배열되어 있다. 신도비는 묘소 좌측 아래에 있는데 2단의 대좌 위에 장방형의 기대를 놓고, 그 위에 비신과 이수를 얹은 것으로 이수의 섬세하게 표현된 두 마리의 용은 사실적이다. 비문은 소세양(蘇世讓)이 찬하고, 이황(李滉 : 1501~1570)이 글을 써서 명종(明宗) 17년(1562)에 건립한 것이다.
(자료출처: 문화재청 / 『경기문화재총람-도지정편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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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내용 출처 : 군포시청
정난종(鄭蘭宗, 1433∼1489)
정난종(鄭蘭宗)은 조선전기의 문신 및 서예가로 자는 국형(國馨), 호는 허백당(虛白堂), 본관은 동래이다. 진주목사를 지낸 사(賜)의 아들이다. 세조 2년(1456)에 생원 진사시와 식년(式年)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부정자(承文院副正字)를 거쳐 검열, 대교, 통례문봉례랑(通禮門奉禮郞), 이조좌랑 등을 역임하였다. 1463년에 시강원문학을 거쳐 예조정랑, 종부시소윤(宗簿寺少尹)을 지냈고 1466년에 문과 중시(重試)에 급제하여 동부승지가 되었다. 이어 좌부승지, 예조참판을 지낸 뒤 형조참판으로서 오위장(五衛將)을 겸하였다.세조 13년(1467)에 황해도 관찰사로 재직하던 중 이시애(李施愛)의 난 평정에 공을 세우고 이듬해 호조참판으로 전임되었다. 1469년에 동지춘추관사로 『세조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성종 1년(1470)에 동지중추부사로서 사은사의 부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온 뒤 이듬해 순성좌리공신(純誠佐理功臣) 4등에 올라 동래군(東萊君)에 봉하여졌고, 『예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그 뒤 영안도관찰사, 호조참판, 한성부판윤, 전라도 관찰사를 지냈다. 1483년에 주문사(奏聞使)의 부사로 재차 명나라에다녀온 후 평안도 병마절도사, 우참찬, 이조판서, 공조판서, 호조판서를 역임하였다.
그는 이른바 훈구파의 중진으로서 성리학에 밝았고, 서예에도 일가를 이루어 성임(成任)과 함께 세조, 성종 대 최고의 서예가로 일컬어졌다. 그는 초서와 예서를 잘 썼는데, 특히 조맹부체(趙孟採體)에 뛰어났다. 세조 11년(1464)에 『원각경(圓覺經)』을 인쇄하기 위하여 그에게 주자체(鑄字體)를 쓰도록 하였는데 이 활자가 바로 ‘을유자(乙酉字)’이다. 금석문에도 그의 필적이 많이 남아 있다. 서울 탑골공원의 「원각사비음(圓覺寺碑陰)」, 경기도 양주의 「고령부원군신숙주묘표(高靈府院君申叔舟墓表)」와 「윤자운신도비(尹子雲神道碑)」, 강원도 양양의 「낙산사종명(洛山寺鐘銘)」과 고성의 「유점사종명(楡岾寺鐘銘)」, 서울 덕수궁의 「흥천사종명(興天寺鐘銘)」 등이 그의 글씨이다. 시호는 익혜(翼惠)이고, 묘는 지금의 군포시 속달동에 있다.
정광필(鄭光弼, 1462∼1538)
정광필(鄭光弼)은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자는 사훈(士勛), 호는 수부(守夫), 본관은 동래이다. 이조판서를 난종(蘭宗)의 아들이다. 성종 23년(1492)에 진사에 오르고 같은 해 식년 문과에 을과로 급제한 뒤 성균관학유, 의정부사록, 봉상시직장(奉常寺直長) 등을 역임하였다. 성균관 학정(學正)으로 있을 때 이극균(李克均)의 추천으로 『성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연산군 10년(1504)에 직제학을 거쳐 이조참의가 되었는데, 임금이 사냥을 너무 자주 행한다고 간하였다가 아산으로 유배되었다. 1506년 중종반정 후 부제학에 오르고 그 후 이조참판, 예조판서, 대제학을 거쳐 1510년에 우참찬으로 전라도 도순찰사(都巡察使)가 되어 삼포왜란(三浦倭亂)을 수습하고 병조판서에 올랐다.
1512년에는 함경도 관찰사가 되어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는 데 공헌하였다. 곧이어 우의정과 좌의정이 되고 1516년에 영의정이 되었다. 1519년에 일어난 기묘사화 때 조광조(趙光祖)를 구하려다 영중추부사로 좌천되었고 1527년에 다시 영의정이 되었다.
일찍이 1515년에 장경왕후(章敬王后)가 죽고 중종의 총애를 받던 후궁이 자기의 소생을 끼고 왕비의 자리에 오르려 하자, 그는 홍문관 동료들을 이끌고 경전(經傳)을 인용하며 극간하여 새로이 왕비를 맞아들이게 하였다. 1519년에 중종이 사정전(思政殿)에 들러 천재(天災)의 원인이 될만한 정치의 잘못을 물었을 때 한충(韓忠)이 그를 비루한 재상이라 탄핵하였다. 이에 신용개(申用漑)는 선비가 대신을 면대하여 배척하는 풍조는 근절되어야 한다며 한충의 논죄를 주장하였으나, 그는 오히려 젊은 사람들의 바른 말 하는 풍조를 꺽어 억제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하여 재상의 넓은 도량을 보였다.
중종 28년(1533)에 영상에서 물러나 회덕에 머물러 있었는데, 후임 영상 김안로(金安老)가 장경왕후 국장때 정광필이 총호사(摠護使)를 맡아 능지를 불길한 땅에 잡았다고 무고하여 김해로 유배되었다. 이것은 김안로의 아들 희(禧)가 중종의 공주 효혜공주(孝惠公主)에게 장가들어 부마가 되었는데, 이 때 호곶목장(壺串牧場)을 받아서 밭을 일구고자 하였으므로 정광필이 이를 저지하였으므로 김안로의 원한을 샀기 때문이었다. 1537년에 김안로가 사사(賜死)되자 곧 풀려나 영중추부사가 되었다.
중종의 묘정에 배향되고 회덕서원과 완담향사(浣潭鄕祠)에 향사되었다. 그의 묘는 지금의 군포시 속달동에 있는데, 시호는 문익(文翼)이다. 저서로는 『정문익공유고(鄭文翼公遺稿)』가 있다.
『경기문화재대관-도지정편』
『군포시의 역사와 문화유적』
『군포의 문화유적 길잡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