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조선생묘(李基祚先生墓)는 경기도기념물 제121호로 소재지는 경기도 군포시 산본동 산1152-11번지이다.
조선 인조(仁祖) · 효종(孝宗) 때의 문신으로 활약한 이기조(1595~1653)를 모신 유택이다. 이기조는 광해군(光海君) 7년(1615) 진사로서 알성문과(謁聖文科)에 급제,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형조좌랑(刑曹佐郎)에 기용되어 병조참의(兵曹參議)·공주목사(牧使)등을 거쳐 경상도관찰사(觀察使)를 역임하며 많은 치적을 쌓아 송덕비(頌德碑)가 세워졌다. 이어 대사간(大司諫)·이조참판(吏曹參判)을 역임하고 인조 23년(1645) 청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지나친 세공미(歲貢米)의 부담을 감축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후 예조판서(禮曹判書)에 올랐으나 김육(金堉)등의 탄핵으로 함경감사(監司)로 밀려났다가 효종 4년(1653) 공조판서에 임명되어 돌아오던 중 김화(金化)에서 병사하였다.
봉분은 단분이며 부인 고령신씨(高靈申氏)와의 합장묘이다. 봉분 앞에 상석, 향로석이 있으며 상석을 중심으로 전방에 좌우로 동자상, 망주석, 문인석이 1쌍씩 배열되어 있다. 묘역 앞에는 박세채(朴世采 : 1631~1695)가 찬(撰)하여 숙종(肅宗) 31년(1705)에 건립한 신도비가 있다. 이 묘역은 원래 산본동 산16에 위치하였으나 산본 지역의 택지 개발로 인하여 1992년 현 위치로 이장(移葬)하게 되었다. 이장 직전에 도 기념물로 지정되어 발굴이 이루어졌다. 발굴 조사 결과 봉분은 전면과 좌우면이 장대석을 이용한 호석(護石)으로 둘러져 있었고, 봉분 좌측 가장자리 호석 바깥쪽에서 청화백자(靑畫白磁)로 만든 직사각형 판형(板形)의 묘지석(墓誌石) 14매(枚)가 출토되었고, 내부 구조는 회벽(灰壁)을 2칸으로 구축한 다음 그 안에 각각 목관(木棺)을 안치한 회곽묘(灰槨墓)임을 알 수 있었다. 또한 묘지석의 내용을 통하여 원래의 묘역이 영조(英祖) 4년(1728)에 이장되어 조성된 것이 확인되었는데 이 묘역의 시대는 이것을 기준한 것이다.
(자료출처: 『경기문화재총람-도지정편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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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내용 출처 : 군포시청
이기조(李基祚, 1595∼1653)
이기조(李基祚)는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자는 자선(子善), 호는 호암(浩菴), 본관은 한산(韓山)이다. 판서를 지낸 현영(顯英)의 아들이며 박동열(朴東說)의 문인이다. 광해군 7년(1615) 진사로서 알성문과(謁聖文科)에 병과로 급제하여승문원에 들어가 박사로 정홍명(鄭弘溟)을 천거했다가 정인홍(鄭仁弘) 등 대북파(大北派)의 탄핵에 의하여 파직되어 그의 아버지 현영과 함께 수원 쌍부촌(雙阜村)에 은거하였다. 1623년에 인조반정으로 형조좌랑이 되었다가 뒤이어 정언(正言)이 되었다. 이듬해 일어난 이괄(李适)의 난 때에는 한남도원수(漢南都元帥)의 종사관(從事官)으로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웠다. 이후 지평(持平), 헌납(獻納), 수찬, 교리, 이조좌랑, 응교(應敎), 좌부승지 등의 청요직(淸要職)을 여러 차례 역임한 뒤 병조참의, 공주목사(公州牧使), 호조참의를 거쳐 인조 13년(1635)에는 경상도 관찰사로 나가 많은치적을 쌓아 송덕비가 세워졌다. 1636년 안변부사로 있을 때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평안도찬획사(平安道贊劃使)로서 적과 싸우기를 원하였으나 감사(監司)의 반대로 좌절되자 죽도(竹島)에 영을 설치하고 백성들을 피란시켜 적의 칼날을 피할 수 있게 하였다. 난이 끝난후 도승지에 이어 대사간, 이조참의와 참판을 역임하였고, 1645년에 부제학으로서 동지사(冬至使) 겸 정조성절사(正朝聖節使)로서 청나라에 가서 지나친 세공미 요구를 감축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인조 24년(1646)에 민회빈(愍懷嬪)강씨의 사사(賜死)를 반대하다가 삼척부사로 좌천되자 사직하였다.
649년 5월에 효종이 즉위하자 호조판서에 올랐으나 대동법의 시행 및 화폐 사용 등의 문제로 김육(金堉)과 뜻을 달리하여 대립하였다. 1650년에 효종이 성지(城池)를 수축하기 위하여 ‘왜정가려(倭情可慮)’라는 이유로 청나라에 보내는 외교문서에서 남쪽에 성을 쌓고 군사를 훈련할 것을 주장하였고 또 송시열(宋時烈)이 지은 『장릉지문(長陵誌文)』에 청나라 연호를 쓰지 않았으므로, 청나라가 이를 강화조약의 위반이라 하여 조선 정부를 추궁하였을 때 그 책임으로 이경석(李景奭) 조경(趙絅) 등이 청나라 사신으로부터 조사를 받았다. 이에 이기조는 연대책임을 주장하여 이들을 적극적으로 변호하여 무사하게 하였으므로 효종으로부터 총애를 받았다. 이어 진주사(陳奏使)의 부사로서 청나라에 들어가 이 일을 잘 수습하고 돌아와 우참찬이 되고 이어서 예조판서가 되었으나 종묘수리에 태만하였다는 김육 등의 탄핵을 받아 함경감사로 좌천되었으나 병으로 관직을 사퇴하였다. 1653년에 공조판서에 임명되어 돌아오던중 김화에서 병으로 죽었다. 묘는 지금의 군포시 산본동에 있다. 사후 영의정으로 추증되었고 충간(忠簡)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경기 묘제 석조 미술 上·下』
『문화재안내문안집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