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포 산본동 조선백자 요지(軍浦 山本洞 朝鮮白磁 窯址)는 사적 제342호로 소재지는 경기도 군포시 산본동 1057-4번지이다.
군포 산본동 조선백자요지는 지리적으로 경기도의 광주산맥 남단에 해당하는 수리산(修理山) 동북쪽 고지에서 남동쪽으로 내려오는 능선의 끝부분에 위치한다. 해발 91~98m 정도의 구릉에 자리한 이 가마터는 비교적 가파른 비탈의 암반 위에 자리를 잡고 있으며 골안마을 뒤쪽의 당성사(唐盛寺) 오른편에 놓여 있다.
지표조사 시 유적 근처에 있는 당성사 주지 스님의 제보에 의해 발견되었다는 이 유적은 백자편 및 가마 사용 폐기물들이 퇴적되어 있는 요지 부분과, 이 요지 아래편의 토기 산포지역이 원래의 발굴 대상이었으나 토기 산포지역은 조사 착수 직후에 문화층이나 유구가 전혀 보이지 않고 곧바로 생토층이 드러났으며, 이곳의 토기파편들은 위쪽의 요지 지역에서 사용되었던 토기의 파편들임이 밝혀져 발굴조사는 요지에만 집중되어 실시되었다.
발굴조사는 1990년 7월부터 90일 간에 걸쳐 실시되었으며 크게 층위 확인 및 퇴적조사를 위한 트렌치 작업과 가마유구 조사, 작업장 조사의 세 부분으로 조사되었다. 퇴적층 조사에서는 먼저 구릉의 정상부를 기점으로 하여 남북 기선과 직교되는 동서 기선을 잡아 설정하였다. 퇴적은 가마유구 주위에 집중적으로 쌓여 있고 가마 주변으로는 퇴적층이 거의 없었다.
특히 A가마 봉통부와 B가마 끝부분 근처에 퇴적이 깊게 형성되어 있으며, 이를 따라 상하좌우로 갈수록 퇴적이 얇아진다. 토층상태는 10~20㎝의 표토층 아래에 대체로 흑갈색부식토층이 나오며, 이 층부터 유물포함층이 되는데, 이 아래의 퇴적상태는 구역에 따라 차이가 많으며, 생토층은 점성이 약간 있는 황갈색토에 산돌들이 많은 것이 특징이다.
트렌치 중, 종③ 트렌치는 퇴적상태가 가장 양호하며, 또한 A·B 두 가마의 선후 관계에 따른 퇴적이 형성되어 있었고, 이 트렌치는 폐기물 퇴적지역으로 여기서 구지표층은 A가마 봉통부에 딸린 부엌 바닥면과 연결되는 층으로 대체로 이 층 아래는 A가마와 이 층 위로는 B가마와 연결되는 퇴적으로 추정된다. 한편 동서 기선의 동쪽부분인 횡E①② 트렌치에서는 표토층 아래에 자기편과 가마벽편이 다수 섞인 흑갈색부식토층이 있고, 그 아래에는 수비질 후에 버린 것으로 보이는 희고 굵은 모래층이 25~30㎝ 두께로 나타났다. 이 모래층은 분명 수비시설이나 작업장과 관련된 층으로 생각되며, 이 층의 범위 및 수비통이나 작업장을 확인해 보았으나, 이 면은 종E① 트렌치 북측방향1.5m 지점까지 계속되다 사라지며, 이 주위에 관련 유구는 나타나지 않았다. 이트렌치에 이어서 다시 산 쪽으로 굴개한 종E② 트렌치에서는 퇴적층 속에서 B가마의 주변 퇴적상황과는 달리 자기편들의 기벽이 얇고 약간 경질의 백자류들이 많이 나오고 태토빚음받침도 보다 작은 것들이 많았는데, 대체로 그 양상이 종E③ 트렌치의 구지표면 이하층과 유사하며, B가마보다 앞선 A가마를 발견하였다.
가마유구 조사에서 B가마 유구는 표토 바로 아래 가마벽편들이 섞인 퇴적층을 걷어내자, 불창 기둥과 불 맞은 돌들이 일부 드러나 칸가마였음을 알 수 있었다. 곧이어 불창 기둥 3개를 확인하였고 불창 기둥의 하단에서는 곳곳에 유약의 재료로 사용하기 위한 석회석 덩어리들이 구워진 상태였으며 불창 기둥의 상부에는 장방형 판석과 잡석들이 쌓여 있었다. 또한 최초의 불창 구조에서2.6m 정도 떨어진 지점에서 또 다른 불창시설이 드러났다. 불창 기둥은 3개이고 굵기는 앞 것이 직경 20㎝ 이내인데 비해 이것은 30㎝가 넘는 큰 것이었다. 이를 잠정적으로 a-1 칸이라 정하고 다시 아래로 연장해보니 지표 밑 76㎝ 면에서 두께 4㎝, 지름 10㎝가량의 개떡들이 일정하게 줄지어 노출되어, 이 바닥면을 정리한 즉 10㎝ 정도의 간격을 유지하면서 약간의 계단상을 이루고 있으며, 가마 우측 벽도 나타났다.
이 개떡이 깔린 바닥면을 따라 내려가니 개떡 위에 소성 시 얹어진 상태의 소성불량 접시나 발(鉢)들이 간간이 발견되었으며, a-1칸에서부터 3.8m 지점에 2개의 불창 기둥이 나타나 이곳을 a-2칸이라 명명하였다. 계속 흑갈색부식토층과 그 아래 주저앉은 얇은 가마벽편들을 제거하면서 하강작업을 하니 역시 a-2칸과 비슷한 양상으로 개떡이 깔리고 그 위에 소성불량의 백자 파편들이 흩어져 있는 바닥면이 나왔으며, 좌우 가마벽도 확인되었는데, 잔존 높이가 대략 30~40㎝ 정도였다 이곳을 a-3칸이라 하고 가마벽을 모두 노출시켰다.
다시 아래로 연결시켜 하강작업을 한 결과 a-3칸의 끝에서 3개의 불창 기둥을 확인하였는데, a-3칸의 길이는 3.9m에달하였다. 이어서 불창 기둥의1.3m 앞에서는 돌무더기가 가로 놓여 있고 이 사이의 바닥 레벨이 현격히 떨어지고 있어 봉통부일 것으로 판단되었다. 이 부분에서는 하부 30㎝ 정도까지는 흑갈색 부식토층이었으나 이 아래부터는 적갈색의 토층 속에 가마벽 및 천장편들이 가득 채워져 있어 이들 큼직큼직한 퇴적물들을 걷어내자 지표 밑 70㎝부터 봉통부의 구조가 드러났다. 일단 봉통부가 확인되면서 거의 완전한 구조를 알 수 있는 칸가마가 나타나 이 가마유구에 대한 완벽한 노출과 정밀한 조사를 실시하였다.
이어서 가마 뒤쪽 부분을 연장조사하였는데, a-1칸의 최초 노출 불창 구조 부분에 쌓여진 잡석들을 제거하자 불창 기둥들과 직교되게 바닥에 박힌 이 가마 뒤쪽 연장조사에서는 불 맞은 진흙 바닥면이 4m 뒤까지 확인되었으나, 가마벽 등의 유구는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
봉통에 연결된 부엌 바닥의 조사에서는 퇴적위에 두꺼운 진흙을 깔아, 사용했음이 드러났으며 이 진흙 면 아래 현재의 화구 바로 앞에서 또 다른 봉통 바닥면이 나타났다. 부엌 바닥으로 사용된 이 진흙 면은 위에 재나 숯이 깔려 있었으며, 아래쪽과 오른쪽으로 둥글게 치솟아 올라갔다. 또한 남서방향으로 가마와 나란하게 피트를 넣어 확인한바, 가마벽이 노출되어 조사를 진행하여 봉통부를 확인했으며, 이곳에서도 앞의 봉통부와 마찬가지로 큼직 큼직한 가마벽편들이 꽉 차 있어서 이를 걷어내자 봉통 바닥이 나타났고 이 바닥면을 따라 나아가니 봉통 입구의 우측에 치우쳐 화강암제의 화문(火門)이 드러났다. 이로서 이 가마는 애초에 구릉 남서 지역의 맨 아래부터 사용되다가 거의 한 칸을 폐기시키고 위로 올라가 1차, 2차 봉통을 설치해 사용했음을 알 수 있었다. 가마 뒤쪽의 정밀조사에서는 굴뚝부의 왼편 바깥쪽에 치우쳐서 이 가마 이전에 사용되었던 또 다른 가마유구들의 잔재들이 중복되어 나타났는데, 이 위에 가마벽이 차례로 확인되었다. 이 3개의 가마벽들은 현 가마와 각도를 달리하고 있어 이들이 먼저 방향을 달리해 사용되다가 폐기되고 A가마를 지금 상태로 축조했음이 밝혀졌다.
한편 앞의 종③ 트렌치의 조사에서 재가 다량으로 섞인 층이 나타났는데 이곳에서 발견된 봉통부도 앞서 발견된 가마의 봉통부와 성격이 같았으며, 현 가마보다 앞선 시기의 가마터로 그 앞에서 같은 성격의 봉통부가 또 하나 발견되었다. 이 봉통부의 화문과 바닥면을 조사하였는데, 역시 재가 깔려있었으며, 이 재가 깔린 바닥면을 확장하는 과정에서 이 면에 붙어서 청자나 백자를 함께 구운 예들이 다량으로 출토되었으며, 이 층은 곧 바로 종③ 트렌치의 구지표면층과 연결되고 있었다.
작업장 조사는 가마 발견으로 인해 작업장은 통상의 예로 보아 봉통부 근처의 물이 가까이 있는 평지에 위치할 것으로 예상하였으나, 종⑤ 트렌치에서 백토를 말리는 유구인 돌깐시설이 발견되었다. 이 돌깐 시설 외에는 백토가 깔린 작업장 바닥면이나 기타 시설들이 전혀 확인되지 않았고, 다만 구릉 위쪽에서 두 줄만 남은 불고래 구조를 확인하고 또 근처에서 돌로 쌓은 아궁이 시설만을 찾는데 그쳤다.
백토 말리는 돌깐유구는 봉통부만 남아 있는 A가마와 관련된 퇴적을 파고 이루어졌으며, 위치도 A가마의 중심선상에 있어 이 유구는 앞 시기 가마와 관련이 없고, 뒷 시기 B가마 운영 시 사용된 작업장으로 추정된다. 또한 동남쪽에서 불고래유구를 찾아내어 주변에서 둥글게 돌아가며 잡석들을 박아 놓은 백토 저장시설을 발견하였으며, 남서쪽의 평지부분은 거의 표토 아래에서 생토면이 나타나 유구가 확인되지 않았다. 기존 발견된 불고래유구의 서쪽에서 또 하나의 불고래유구가 노출되었으나, 석열의 파괴정도가 심하여 규모 파악이 불가능 하였으며, 백토 깔린 바닥에서도 기둥을 받쳤던 초석이나 주혈은 파악이 어려웠다.
발굴조사를 통해서 출토된 유물은 대부분 백자류(白磁類) 등이며 발(鉢)·접시류 들이었고, 이외 청화백자편(靑華白磁片)·철화백자편(鐵畵白磁片)·청자(靑磁)·분청자기(粉靑磁器)·토기류(土器類) 등이 극소량 출토되었다. 그 외 소성에 관계된 개떡과 치차형(齒檘形) 그릇 받침들이 많았고, 갑발(匣鉢)뚜껑 1편도 수습되었다. 기타 소성에 관계된 개떡과 치차형 그릇 받침들이 많았고, 갑발 뚜껑 1편도 수습되었다. 출토유물의 상황에서 주목되는 것은 발굴경과에서 기술한대로 A·B가마의 사용에 따른 퇴적이 지형을 달리하거나 층위를 달리해 분포한 사실이다. 즉 지역적으로는 북동지역의 퇴적과 종③ 트렌치 내의 구 지표면 이하층 출토품들이 앞 시기의 A가마 운용시에 이루어진 것인데, 이들은 B가마 주위에 쌓인 퇴적과는 약간 다른 양상을 보였다.
이곳에서는 다소 연질의 백자류와 청자편들이 많이 나왔으며 태토빚음에도 작은 것들이 많다는 점이 우선 눈에 띄는 현상이다. 이에 비해 B가마 퇴적 관련에서는 연질계 백자는 전혀 없이 푸른색이나 회색기를 띠고 매우 경질인 백자가 대부분이며, 태토빚음받침도 굵은 편이다. 그러나 이러한 양자 간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기형상의 차이는 출토품을 정리해 본 결과 거의 나타나지 않았다. 퇴적조사에서도 종③ 트렌치에서는 4개의 층위로 구분되어 채집할 수 있었는데, 구지표면과 그 아래층이 A가마 관계 층이고, 그 위의 2개 층이 B가마관련 층으로 판단되나, 역시 앞의 지역적 현상과일치하면서 기형의 차이는 보이지 않는다.
이 가마터 최종 시기의 유물 상황은 발굴조사 보고서 상에 기재된 B2가마의 소성칸 바닥에 남아 있는 것들로 대표될 수 있다. 최후의 소성이 끝남과 함께 그대로 방치된 채 폐기된 바닥에서는 백자 유약이 거의 용융이 안된 채 표면에 허옇게 남아 있고 적갈색을 보이는데, 특히 둘째 칸에서는 굽던 당시 그대로의 모습을 한 완형의 접시류 10여점이 개떡 위에 올려져있어, 이 가마 최후의 기형·소성방법·굽받침 사용법 등을 알 수 있었다. 또 첫째 칸에서도 많은 파편들이 바닥에 널려있어 이것들도 최종시기 번조품의 상황을 이해하는데 좋은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이 가마터가 가진 가장 큰 의의는 조선 전기에 사용된 거의 완전한 ‘칸가마 유구’가 최초로 발견되었다는 점과 동일 요지에서 시기와 방향과 위치가 서로 다른 두개의 가마유구가 공존하고 있으며 그 외에 봉통부(굴뚝부분)를 돌과 진흙을 섞어 축조한 점, 봉통높이가 1m이상 되는 점, 가마벽에 유약을 발라 보열(保熱)효과를 높인 점 등 조선 전기 가마구조에 대한 새로운 사실들을 밝혀내었다고 하는 점이다. 특히 두개의 선·후 관계가 뚜렷한 퇴적층이 조사되어 조선 전기 백자의 변천연구(상대편년)에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된다. 또한 이 가마터는 주변에서 발굴조사 결과 밝혀진 시기로는 가장 늦은 시기의 것으로, 청화백자의 존재는 지방 가마가 중앙 관요의 영향아래 청화백자가 제조되고 있었음을 알게 해주어 당시 관요와 지방 가마와의 상황을 알려주는 일례로서 도자사적으로도 의의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자료출처 : 『문화재대관 사적 제1권(증보판)』)
『경기문화재대관-국가지정편』
『문화재안내문안집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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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포 산본동 조선백자 요지.pdf (154.8 K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