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이씨안양군묘(全州李氏安陽君墓)는 경기도기념물 제122호로 소재지는 경기도 군포시 산본동 산158-1번지이다.
조선 성종(成宗)의 셋째 아들 안양군 이행(李烆)을 모신 유택이다. 안양군은 성종의 셋째 아들로 어머니는 후궁인 귀인 정씨(貴人鄭氏)이다. 연산군(燕山君)의 생모인 폐비 윤씨(尹氏) 사건(1479)의 원인이 성종의 후궁인 정씨와 엄씨(嚴氏)의 참소에 있다고 판단하여 연산군 10년(1504) 어머니와 봉안군(鳳安君 : 성종의 6남)과 함께 사사(賜死)되었다. 1506년 중종(中宗)이 즉위하면서 복작(復爵)되었고, 중종15년(1520년)에 부인의 상소에 따라 좋은 곳을 골라 다시 장례 지내도록 교지가 내렸다. 따라서 이 묘역 석물의 조성 시기는 중종15년경으로 판단된다.
묘역은 사성(沙成)으로 둘러싸여 있고, 봉분은 단분으로 부인 능성구씨(陵城具氏)와의 합장묘이다. 봉분 앞에 상석과 향로석이 있고, 상석 가까운 곳에 좌우로 허리 부분까지만 형상화한 고졸(古拙)한 형태의 동자상이 있다. 상석의 전방에는 장명등이 있고, 상석과 장명등을 중심으로 좌우에 망주석, 석양(石羊)·문인석이 1상씩 배열되어 있다. 묘비는 봉분의 우측에 위치하고 있는데, 비신(碑身)의 측면에 ‘건좌병진(乾坐丙辰)’이라는 묘소의 방향과 건립 연대의 간지(干支)가 기록되었으나 연호가 없어 정확한 연대를 알 수 없다. 묘역 앞에 위치한 신도비는 신종묵(愼宗黙)이 찬(撰)한 원래의 비문을 1976년 이일형(李一珩)이 쓰고 김충현(金忠顯)이 전액(篆額)을 하여 건립하였다. 이 묘역은 원래의 자리가 아니라 고종(高宗)32년(1895) 양주에서 묘역의 석물과 함께 이장해 온 것이라고 한다.
(자료출처 : 『경기문화재총람-도지정편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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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내용 출처 : 군포시청
안양군(安陽君, 1480∼1505)
안양군(安陽君)은 조선 초기의 왕자로 이름은 행이다. 성종의 셋째 아들로 어머니는 성종의 후궁인 귀인(貴人) 정씨이다. 부인은 판서를 지낸 능천궁(綾川君) 구수영(具壽永)의 딸이다. 연산군 10년(1504)에 일어난 갑자사화(甲子士禍) 때 연산군은 생모인 폐비윤씨사건의 원인이 성종의 후궁인 정씨와 엄(嚴)씨의 참소에 있다고 판단하여, 사건의 처리 과정에서 안양군의 친동생인 봉안군(鳳安君) 봉을 이에 연루시켜 생모 정씨를 때리게 하였다. 봉안군은 자기 어머니인 줄 알고 있었으나, 안양군은 누구인지도 모르고 생모 정씨를 때릴 정도로 우둔하였다. 같은 해 안양군은 제천으로 안치되고 집안의 재산은 적몰되었다. 그리고 노비 전토(田土) 사채(私債)는 추쇄되었고, 처는 견성군(甄城君)에게 사여되었으며 봉안군과 함께 사약을 받고 죽었다. 중종 1년(1506)에 중종반정으로 중종이 즉위하면서 안양군의 생모인 정씨에게는 삼년제물이 내려지고 안양군과 봉안군이 복작(復爵)되어 쌀 종이 정포(正布)·면 등이 내려짐과 동시에 관리를 파견하여 제사지내도록 하였다. 중종 15년(1520)에 안양군 부인의 상소에 따라 좋은 땅을 골라 양주에 개장하고, 고종 2년(1865)에 지금의 군포시 산본동 광정으로 옮겼다. 시호는 공회(恭懷)이다.
『경기문화재대관-도지정편』
『군포시의 역사와 문화유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