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만기묘역(金萬基墓域) 은 경기도기념물 제131로 소재지는 경기도 군포시 대야미동 산1-12번지다.
조선 효종(孝宗)~숙종(肅宗) 연간의 문신인 김만기(1633~1687)를 모신 유택이다. 김만기는 송시열의 문인으로 효종3년(1652)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이듬해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에 등용 되고 수찬(修撰)·정언(正言)·교리(校理)등을 역임하였다. 현종(顯宗)12년(1671) 딸이 세자빈이 되었고 1674년 숙종이 즉위하자 국구(國舅)로서 영돈령부사(領敦寧府事)로 승진, 광성부원군(光城府院君)에 봉해졌다. 총융사(摠戎使)를 겸관함으로써 병권을 장악하였고 김수항(金壽恒 : 1629~1689)의 천거로 대제학(大提學)이 되었다. 숙종6년(1680) 경신환국(庚辛煥局) 때 훈련대장(訓練大將)으로서 역모 사건을 다스려 보사공신(保社功臣) 1등에 책록되었다.
봉분은 원형의 호석(護石)이 둘려진 단분으로 부인 한씨(韓氏)와의 합장묘이다. 봉분 앞에 혼유석·상석·향로석이 있다. 묘비는 봉분의 좌우측에 2기가 있는데 우측의 묘비는 송시열(宋時烈 : 1607~1689)이 찬(撰)하고 김진규(金鎭圭 : 1658~1716)가 써서 숙종 14년(1688)에 건립한 것이며, 좌측의 묘비는 전면에 20자의 숙종 친필이 음각되어 있으며 숙종 25년(1699)에 건립한 것이다. 묘역 전방 좌우에는 망주석과 문인석이 1쌍씩 배열되어 있다. 신도비는 묘역의 능선 밑에 위치하는데, 팔작지붕형 가첨석(加檐石)·비신(碑身)·기대(基臺)로 구성되어 있고, 비문은 우측 묘비와 마찬가지로 송시열이 찬하고, 김진규가 글과 전액(篆額)을 써서 숙종 29년(1703)에 건립하였다.
(자료출처 : 『경기문화재총람-도지정편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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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내용 출처 : 군포시청
김만기(金萬基, 1633∼1687)
김만기(金萬基)는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자는 영숙(永叔), 호는 서석(瑞石) 또는 정관재(靜觀齋), 본관은 광산이다. 형조참판을 지낸 장생(長生)의 증손이고 생원 익겸(益兼)의 아들인데, 『구운몽』을 지은 서포 김만중(金萬重)이 그의 아우이다. 인경왕후의 아버지인 숙부 익희(益熙)에게서 수학하였으며 송시열(宋時烈)의 문인이다. 효종 3년(1652)에 사마시를 거쳐 이듬해 별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에 등용되고 수찬 정언(正言) 교리 등을 역임하였다. 1657년에 교리로서 글을 올려 『오례의(五禮儀)』의 복상제(服喪制) 등 잘못된 것을 개정하기를 청하였고 1659년 5월에 효종이 죽자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服喪) 문제로 논란이 있을 때 기년설(朞年說)을 주장하여 3년설을 주장하던 남인 윤선도(尹善道)를 공격하였다. 이 후 흥문관 응교, 사헌부 집의, 사간원 사간, 승정원 좌승지, 대사간, 대사성 등을 역임하였다.
현종 12년(1671)에 딸을 세자빈으로 들여 보내고 1673년 영릉(寧陵)을 옮길 때 산릉도감(山陵都監)의 당상관이 되었으며, 1674년 7월에 병조판서로서 다시 자의대비의 복제에 대하여 상소를 올려 3년상을 주장하였다. 그 해 숙종이 즉위하자 국구(國舅)로서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에 승진되고 광성부원군(光城府院君)에 봉해졌다. 그리고 총융사(摠戎使)를 겸함으로써 병권을 장악하였고 김수항(金壽恒)의 천거로 대제학이 되었다. 숙종 6년(1680) 경신환국이 일어났을 때 훈련대장으로서 끝까지 굽히지 않고 남인과 맞섰으며 강만철(姜萬鐵) 등이 허적의 서자 견(堅)과 종실인 복창군(福昌君), 복선군(福善君), 복평군(福平君) 등이 역모를 꾀한다고 고발하자, 이를 다스려 보사공신(保社功臣) 1등에 책록되었다. 그는 현종의 묘정에 배향되었고 묘는 지금의 군포시 대야미동에 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저서로는 『서석집(瑞石集)』 18권이 있다.
『군포금석문대관』
『군포의 문화유적 길잡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