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리 동구릉(九里 東九陵)은 사적 제193호로 소재지는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로 197이다.
조선을 세운 태조의 무덤으로 쓰여지기 시작한 뒤 조선시대를 통하여 가족무덤을 이루고 있는 왕릉군이다. 동구릉이란 도성의 동쪽에 있는 9개의 무덤이란 의미로, 무덤이 생길 때마다 동오릉·동칠릉이라 불렀는데 철종 6년(1855)에 수릉이 옮겨진 이후 동구릉으로 굳어졌다.
태조가 죽은 뒤 태종은 서울 가까운 곳에 후손들이 묻힐 좋은 땅을 찾다가 하륜(河崙)에 의해 이곳을 무덤지역로 정하였다고 한다. 400여 년에 걸쳐 왕릉이 자리잡았음은 동구릉의 지세가 풍수지리설에 의한 명당임을 나타내주는 것이라 하겠다.
동구릉에는 1대 태조의 건원릉을 중심으로 5대 문종과 현덕왕후의 무덤인 현릉, 14대 선조와 의인왕후·계비 인목왕후의 무덤인 목릉, 16대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의 무덤인 휘릉, 18대 현종과 명성왕후의 무덤인 숭릉, 20대 경종의 비 단의왕후의 무덤인 혜릉, 21대 영조와 계비 정순왕후의 무덤인 원릉, 추존 문조대왕과 신정왕후의 무덤인 수릉, 24대 헌종과 효현왕후·계비 효정왕후의 무덤인 경릉 등 9개의 무덤이 있다. 태조의 무덤인 건원릉은 고려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현·정릉을 기본으로 삼아서 만들었으며, 조선왕조 최초의 왕릉으로서 이후 왕릉의 본보기가 되었다.
동구릉은 시대의 변화에 따라서 왕릉이 변화하는 과정을 살필 수 있다. 무덤을 만들 때 각 무덤에 따른 제사를 지내는 공간인 재실을 지었다고 하나 현재 각 무덤에 재실은 없고, 9개 무덤을 하나의 경계지역으로 하여 구릉 남쪽에 재실이 있다.
전체적인 모습은 중앙 북쪽의 건원릉을 중심으로 동쪽에 3개, 서쪽에 5개의 무덤을 거느리고 있는 모습이다. 조선의 왕릉 중 한 지역내에 왕릉군을 이루고 있는 곳은 서오릉과 서삼릉이 있으나, 동구릉에 가장 많은 무덤이 있다.
구리 동구릉을 포함한 조선왕릉(왕릉 40기, 원 13기 등 총 53기)은 2009년 6월 26일 제33차 세계유산위원회에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 동구릉→구리 동구릉 명칭변경(2011.07.28. 문화재청 고시)
(자료출처 :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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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내용 출처 : 문화재청 / 구리문화원 / 경기문화포털
능, 원, 묘의 구분
왕족의 무덤은 왕실의 위계에 따라 능, 원, 묘로 분류된다.
1. 능(陵) : 추존왕, 추존왕비를 포함한 왕과 왕비의 무덤
2. 원(園) : 왕세자와 왕세자비, 그리고 왕의 사친(私親 : 종실로서 임금의 자리에 오른 임금의 생가 어버이)의 무덤
3. 묘(墓) : 나머지 왕족, 즉 왕의 정궁의 아들, 딸인 대군과 공주, 왕의 서자, 서녀인 군과 옹주, 왕의 첩인 후궁, 귀인 등의 무덤
건원릉(健元陵)
건원릉은 조선왕조를 세운 태조 이성계의 능으로 1408년(태종8)에 조영되었다. 건원릉은 고려 왕릉 중 가장 화려하고 잘 정비된 경기도 개풍군에 있는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현정릉 양식을 따랐으며 이후 조선 왕릉제도의 표본이 되었다. 건원릉은 다른 왕릉들과는 달리 봉부넹 갈대를 입혔는데, 이는 고향인 함경도 영흥을 그리워하며 그 곳의 갈대로 자신의 봉분에 덮어 달라고 한 태조 이성계의 유언을 태종이 그대로 따랐기 때문이라고 한다.
건원릉에는 태조의 업적을 기록한 신도비가 세워져 있는데, 현재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왕릉의 신도비는 건원릉의 태조 신도비와 서울의 내곡동 대모산 기슭에 자리잡은 헌릉의 태종 신도비뿐이다.
건원릉의 기본 능제는 전체적으로 고려 공민왕의 현릉을 따르고 있으나 세부적으로는 석물의 배치와 장명등의 조형 등에서 일정한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봉분 주위로 곡장을 두르는 방식은 조선시대의 능제에서 새롭게 추가된 것이며, 석물의 조형은 남송 말기의 중국풍을 거의 따르고 있다.
현릉(顯陵)
현릉은 세종의 맏아들인 조선 제5대 문종(1414~1452)과 왕비 현덕왕후(1418~1441) 권씨의 능으로 문종릉은 1452년(단종 즉위)에 조영되었고 왕비의 능은 다른 곳에서 옮겨왔다. 문종은 몸이 허약해 왕위에 오른지 2년 4개월 만인 39세로 병사하는데, 예기치 않은 문종의 죽음은 단종과 세조로 이어지는 조선사의 또 하나의 피의 역사를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현덕왕후는 단종을 낳고 산후조리가 안 좋아 1441년(세종23) 별세하여 안산 소릉에 묻혔는데 문종이 왕위에 오른 후에 왕비로 추봉되었다. 하지만 왕비의 친정이 단종복위운동에 연루되어 일족이 극형을 받자 죽은 왕비도 서인으로 격하되었으며 안산에 있떤 왕비의 능도 파헤쳐져 물가에 옮겨졌는데, 이후 1513년(중종8)에 가서야 왕비가 복위되어 현재의 위치로 능이 옮겨오게 되었다.
현릉은 건원릉의 동쪽에 있는데 홍살문과 정자각, 비각 등의 부속시설은 하나만 만들고 정자각 뒤의 좌우 언덕에 왕과 왕비의 봉분을 따로 조성한 동원이강 형식을 취하고 있으며, 조선 초에 제정된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양식을 따르고 있는 가장 오래된 능이다.
목릉(穆陵)
목릉은 조선 제14대 선조(1552~1608)와 왕비 의인왕후 박씨(1555~1600), 계비 인목왕후 김씨(1584~1632)의 능으로 세 능이 한 능역에 자리하고 있는데 왕고 계비의 능은 정자각 북편에 동원이강식으로 배치되어 있지만 왕비의 능은 정자각 동편의 언덕에 치우쳐 있어 전체적인 배치는 능역은 같으나 줄기와 형태가 전혀 다른 동역이강식의 형국을 이루고 있다.
조영시기는 왕비의 능이 1600년(선조33), 계비의 능이 1632년(인조10)인데 왕의 능은 1608년 현재의 경릉 자리에 모셨다가 1630년(인조8)에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목릉의 조영은 전통적인 양식을 충실하게 따르고 있다. 하지만 석물들의 조형 기법은 그 수준이 현저히 떨어지는데, 그것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라는 두 차례의 전란으로 인해 능을 조영할 장인을 구하기가 힘들었던 때문이라 여겨진다. 그러나 의인왕후릉의 망주석과 장명등 대석에 처음으로 새겨진 꽃무늬는 이후 왕릉 조영에 많은 영향을 끼쳤으며 조선 말기까지 계속 사용되었다.
휘릉(徽陵)
휘릉은 조선 제16대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 조씨(1624~1688)의 능으로 1688년(숙종14)에 조영되었으며 건원릉의 서편 언덕에 자리하고 있다.
장렬왕후는 15살의 어린 나이에 인조의 계비로 책봉되어 효종, 현종, 숙종대까지 4대에 걸쳐 왕실의 어른으로 지냈으나, 붕당정치의 소용돌이 속에서 왕실생활을 보냈으며 후사없이 65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였다.
휘릉은 숭릉보다 4년 후에 조영되었기 때문에 석물들의 조영기법을 대체로 숭릉의 방식을 따르고 있다. 능의 배치는 질서가 잘 잡혀 있고 자취가 정연한 편이다. 무인석은 눈, 코, 입이 과장되게 표현되어 있으며 석물들은 전체적으로 얕고 오밀조밀하게 조각되어 있다.
숭릉(崇陵)
숭릉은 조선 제18대 현종(1641~1674)과 왕비 명성왕후 김씨(1642~1683)의 능으로 1674년(현종15) 조영되었다. 현종은 효종의 맏아들로 병자호란 후 아버지 효종이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가 있을 때 심양에서 태어났다. 이후 효종의 뒤를 이어 조선 제18대 왕으로 즉위하여 호남지방에 대동법을 시행하고 천문곽측과 역법연구에 이바지하는 등 민생안정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효종은 재위하던 15년 내내 예론의 논쟁에 시달려야 했으며 34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였다.
숭릉의 능제는 『국조오례의』를 따르고 있는데 봉분의 형태는 왕과 왕비의 능이 나란히 있는 쌍릉이며, 봉분 둘레에는 병풍석이 없다. 석물의 조형 양식은 파주시 탄현면에 있는 인조의 장릉 양식을 계승하고 있다. 한편, 대부분의 능들은 정자각의 지붕이 맞배지붕 양식을 취하는데 반해 숭릉의 정자각은 지붕이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정자각은 보통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만들어졌는데 숭릉의 정자각에는 익랑이 붙어 규모가 커졌다. 이는 명나라가 멸망한 후인 17세기 말 숙종 때 유행하던 중국풍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여겨진다.
혜릉(惠陵)
혜릉은 조선 제20대 경종의 비 단의왕후 심씨(1686~1718)의 능으로 1718년(숙종44) 조영되었다. 단의왕후는 1696년(숙종22) 11세에 세자빈에 책봉되었으나 경종이 즉위하기 2년 전인 1718년 후사없이 33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였으며, 경종이 즉위한 후 왕후로 추존되었다.
능제는 고양시 서오릉에 있는 인현왕후의 능인 명릉의 제도를 따랐으나 능역은 매우 초라하다. 석물의 규모는 동구릉의 석물 중 가장 왜소한데 당시의 유행과는 달리 옛형식을 따른 점이 특이하다. 한국전쟁 때 부타 주춧돌만 남아있던 홍살문과 정자각은 1995년 12월에 복원되었다. 한편, 조선의 왕릉들은 대부분 북쪽에 머리를 두고 남쪽을 바라보는 북침을 하고 있는데 혜릉의 단의왕후는 서쪽에 머리를 두고 다리를 동쪽으로 향했따.
원릉(元陵)
원릉은 조선 제21대 영조(1694~1776)와 계비 정순왕후 김씨(1745~1805)의 능으로 왕의 능은 1776년(영조52)에 조영되고, 계비의 능은 1805년(순조5)에 조영되었다. 숙종의 넷째 아들이자 경종의 동생인 영조는 83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기까지 52년간 왕위에 있었던 조선시대 최장수 왕이었다.
영조는 세자때부터 붕당정치에 휘말려 생명의 위협까지 당하는 고초를 겪었으나 자신이 처한 위치는 탕평정국으로 이끌어 가면서 각 방면에 걸쳐 부흥기를 이끌었던 영주로 평가받고 있다. 하지만 붕당정치의 폐해로 인해 자신의 아들인 장헌세자(사도세자)를 끝내 뒤주 속에 가두어 죽이고 만다.
정순왕후는 15살의 나이로 66세 영조의 비가 되었으며, 정조가 승하하고 순조가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수렴청정을 하며 국정을 이끌기도 하였다.
원릉은 왕의 능과 계비의 능이 나란히 자리하는 쌍릉으로 조영되었으며, 상설제도는 영조때에 정비된 『국조상례보편』의 표본을 딸고 있다. 원릉은 병풍석 없이 난간석으로 두 봉분을 감싸안고 있으며 봉분 앞에는 상석이 각각 하나씩 놓여있다. 문인석과 무인석은 비교적 섬세하게 조각되어 있으나 입체감은 약간 떨어진다.
수릉(綏陵)
수릉은 조선 제23대 순조의 세자(효명세자)였지만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요절한 추존왕 익종(1809~1830)과 그의 비 신정왕후 조씨(1808~1890)의 능이다.
익종은 4세 때 왕세자로 책봉되고, 19세 때부터는 순조의 명으로 대리청정을 시작했으나 불행하게도 4년만에 22세의 나이로 요절하였다. 이후 익종의 아들 헌종이 즉위하여 아버지를 추존하여 익조이라 했고, 1899년(광무3)에 고종이 다시 문조익황제로 추존하였다.
신정왕는 83세까지 천수를 누리며 조선 후기 정국을 주도하였는데, 대왕대비로 있던 1863년(철종14) 철종이 승하핮 왕위결정권을 갖고 고종을 왕이 되기 한 후 수렴청정을 하면서 흥선대원군과 함께 정국을 주도하였다.
능은 단릉처럼 봉분도 하나고 상석도 하나만 마련해 놓았다. 능제는 대부분 『국조상례보편』을 따르고 있으나 문인석이 복두대신 금관을 쓰고 있는 못브이 색다르다. 그리고 능 앞의 3단 중 가운데단과 아랫단이 하나로 합해져 문인석과 무인석이 같은 단에 서 있다. 봉분 주위 석물의 규모는 왜소하고 섬약하지만 무늬의 장식은 세밀한 편이다.
경릉(景陵)
경릉은 조선 제24대 헌종(1827~1849)과 왕비 효현왕후 김씨(1828~1843), 계비 효정왕후 홍씨(1831~1904)의 능이다. 원래는 목릉의 자리고 3기의 능이 나란히 자리잡은 삼연릉의 형식을 취하고 있는데, 조선시대 왕릉 중에서는 유일한 삼연릉이다. 정면에서 볼 때 가장 왼쪽 봉분이 헌종의 능이고 가운데가 왕비 효현왕후, 그 오른쪽이 계비 효정왕후의 능이다.
헌종은 순조의 손자이며 요절한 추존왕 익종의 아들로 8세의 어린나이로 왕위에 올라 대왕대비인 순원왕후 김씨의 수렴청정을 받았으며, 후사없이 23세의 나이로 요절할 때까지 외척들의 세도정치에 시달렸다. 왕비 효현왕후 김씨는 16세의 나이로 요절하였으며, 계비 효정왕후 홍씨는 74세로 생을 마감하였다.
경릉의 상설제도는 영조때 제정된 『국조상례보편』을 따르고 있는데, 세 봉분은 병풍석 없이 난간석을 터서 연결하였으며 각 능 앞에 상석만 따로 마련했을 뿐 모든 제도를 단릉과 마찬가지로 조영하였다. 또한 능 앞의 3단이 2단으로 생략되어 장명등과 문인석, 무인석이 같은 단에 마련되어 있으며, 문인석과 무인석은 섬세하게 표현되어 있다.
건원릉(태조릉)은 왜 항상 풀이 우거져 있나?
아버지(이성계)와 아들(이방원)의 갈등
이성계는 1335년 10월 11일 함경도 화령(和寧)에서 이자춘 (李子春)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 다. 본관은 전주이고, 자는 중결 (仲潔), 호는 송헌(松軒)이며, 태 조 즉위 후에는 이름을 이단(李 旦), 자를 군진(君晉)으로 고쳤다.
어려서부터 총명할 뿐 아니 라 궁술에 능하였으며, 1356년 (공민왕 5)에 고려가 쌍성총관 부를 탈환할 때 공을 세워 관직 에 등용되었다. 그 후 홍건적과 여진족의 침입을 물리쳤으며, 해안 일 대에 출몰한 왜구도 토벌하였다. 1388년 우군도통사가 되어 요동을 정 벌하러 가던 도중 위화도(威化島)에서 회군하여 최영 등을 제거하고 정 치적 실권을 장악하였다.
정도전·조준 등의 지지를 얻어 토지개혁을 단행함으로써 신흥사대 부 세력의 경제적 기반을 마련하였으며, 1392년에는 정몽주마저 제거 하고 왕위에 오른 뒤 이듬해 나라 이름을 조선(朝鮮)이라 고쳤다.
태조는 첫째 부인 신의왕후와 사이에 방우-방과-방의-방간-방원- 방연과, 두 번째 부인인 신덕왕후와 사이에 방번-방석을 두었다. 그는 즉위 한 달 후 신의왕후 소생들을 배제한 채 11살 된 방석을 세자에 책봉하였는데, 이는 왕자들 간에 왕위 계승권을 둘러싸고 두 차례 살육전 이 벌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그 중심에 있던 인물이 바로 태조의 다섯 째 아들 이방원이다. 그는 조선을 건국하는 데 자신의 공이 형제들 중 가장 컸음에도 공신에 오르지 못하고 세자 자리도 방석에게 빼앗기게 되자 불만이 높아갔다. 그리하여 1398년 8월 사병을 동원하여 반대파 인 정도전·남은·심효생과 방번·방석 형제를 살해하는 왕자의 난을 일으켰다. 태조는 자식들의 피비린내 나는 싸움에 상심한 나머지 왕위를 둘째 아들 방과(정종)에게 넘겨주고(큰아들 방우는 세상을 떠난 상태) 상왕으로 물러났다. 2년 뒤 방원과 방간 간에 벌어진 2차 왕자의 난 을 계기로 세자가 된 이방원은 정종의 양위를 받아 왕위에 오르게 되는 데, 그가 곧 태종이다. 이때 태조는 고향인 함흥으로 돌아가버렸다. 태종이 아버지에게 문안을 드리려고 여러 차례 차사를 보냈지만 화가 난 태조가 차사를 모두 죽이는 바람에 돌아오지 못했다는 전설이 전해진 다. 즉‘무슨 일로 갔다가 돌아오지 않는다’는 뜻의 함흥차사(咸興差使) 라는 말이 여기에서 생겨났다고 한다.
동구릉 가장 안쪽에 있는 건원릉의 사연
동구릉(구리시 인창동 62번지)의 맨 꼭대기에 위치한 건원릉(健元陵) 은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능이다. 능의 이름이 된 건원(健元)은 나라와 도읍을 세웠다는 의미로 붙여졌으며, 조선왕릉 중에서 유일하게 두 글자로 된 능 이름이다.
하지만 태조가 자신 이 죽은 뒤 묻히고자 했던 곳은 건원릉 자리가 아 니라 둘째 부인(신덕왕후)의 무덤이 있는 정릉(貞 陵; 서울 중구 정동)이었다.
그런데 이성계가 세상을 떠났을 때는 태종이 다스리던 시대였다. 태종은 신덕왕후를 몹시 미워 하였다. 왕비로서 제사도 폐하고 계모에게 행하는 제사를 지내도록 할 정도였다. 신덕왕후가 종묘에 배향되고 왕비로서 제사를 받게 된 것은 이로부터 200년이 지난 현종 대에 이르러서이다. 게다가 태조가 승하하자 태종은 곧바로 정릉을 도 성 밖(서울 도봉구 정릉동)으로 옮겨버렸다. 또한 그는 죽어서라도 신 덕왕후와 나란히 묻히고 싶어했던 아버지의 소망도 들어주지 않았다. 현재 태조는 건원릉(구리시)에, 첫째 부인 신의왕후는 제릉(개성시)에, 둘째 부인 신덕왕후는 정릉(서울시)에 각각 묻혀있다.
한편 태조는 자신의 고향인 함흥에 묻어달라는 유언도 남겼다. 그러나 태종은 개국의 시조를 왕궁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묻을 수 없다는 이유로 아버지의 유언을 무시하였다. 대신 함흥에서 억새를 옮겨와 아버지의 봉분을 덮었다. 건원릉이 다른 왕릉과 달리 잔디가 아닌 억새풀 로 덮여있게 된 까닭이다.
동구릉 관리사무소는 매년 한 차례, 즉 한식날(4월 5일경)에 건원릉 의 억새를 제거하고 깔끔하게 정리한다. 억새의 뿌리는 잘못 건드리면 죽기 때문에 건원릉의 봉분은 더욱 조심스럽게 다룬다고 한다. 따라서 한식 며칠 뒤에 건원릉을 찾으면 여느 능과 별 차이 없어 보이지만, 그 외 계절의 건원릉은‘벌초도 하지 않은 채’무성하게 자란 억새로 뒤덮여 있는 모습을 하게 된다.
『(경기도 역사와 문화)백문백답』
『세계유산 동구릉의 보존과 활용 : 세계문화유산 등재 1주년 기념 2010 구리건원학술대회 』
『문화재안내문안집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