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사성선생묘(孟思誠先生墓)는 경기도기념물 제21호로 소재지는 경기도 광주시 광주읍 직리 산27이다.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인 맹사성(1360~1438)을 모신 유택으로 맹씨 문중의 산인 맹산(孟山) 중턱에 위치하고 있다. 그는 어려서 효성이 지극하여 7살때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7일간 단식하고, 3년간 죽을 먹으면서 묘 앞에서 상을 치루어 고향에 효자문이 세워졌다고 한다. 고려 우왕 12년(1386)에 27세의 나이로 문과에 장원급제하였으며, 대사헌·우의정·좌의정 등의 벼슬을 거쳤다. 『태종실록』을 감수하고,『팔도지리지』를 편찬하였으며, 향악을 정리하고 악기를 만들어 조선 초기 문화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봉분은 장대석(長臺石)을 이용한 장방형(長方形)의 호석(護石)으로 둘러싸여 있는데, 이것은 고려시대의 전형적인 봉분 조성 방법으로 조선 전기까지 이어진 것이다. 봉분 앞에는 조선 세종(世宗) 20년(1438)에 건립된 조선 초기 양식의 화관석(花冠石) 묘비가 세워져 있다. 묘비 앞에는 새로 제작한 상석과 향로석이 있으며 새로운 향로석 우측에는 원래의 향로석을 배치하였다. 봉분 우측에는 후손들에 의해 1959년 제작된 새로운 묘비가 있다. 묘역 앞의 좌우로 문인석이 배치되어 있고 역시 1968년에 새로 제작된 망주석과 동자상이 1쌍씩 배치되어 있다.
(자료출처 : 광주시청 / 『경기문화재총람-도지정편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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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내용 출처 : 광주문화원
맹사성(孟思誠, 1360~1438)
선생은 공민왕 9년(1360) 전교부령 맹희도의 아들로 태어났다. 자는 자명(自明) 호는 고불(古佛).동포(東浦)이다. 양촌 권근의 문하에서 일찍부터 뛰어난 재질을 길러 우왕 12년(1386) 27세로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 춘추관 교열을 거쳐 여러 벼슬을 지내다가 조선조에 접어들면서 수원판관, 예조정랑, 시어사 등을 역임하였다. 태종 6년(1406)에 이조참의, 예문관제학을 거쳐 이듬해 시종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판한성 부사가 되고 태종 8년(1408) 대사헌으로 있을 때 왕에게 보고함이 없이 부마 평야군을 지평 박안신으로 하여금 국향(鞠向)한 것이 태종의 노여움을 크게 사서 한주(韓州)에 유배되었으나 당시 영의정 성석린의 극각(極諫)으로 마침내 풀려났다. 그 후 이조참판을 거쳐 예조판서에 오르고 호조, 공조판서 겸 예문관 대제학이 되고 문신으로서는 최초로 삼군도진무(三軍都鎭撫)가 되었다가 68세에 좌의정에 올랐다.
세종 11년(1429) 궤장을 하사받고 다음 해 「태종실록」을 감수하였으며 그 후 좌의정에 올라 이듬해 영춘추관사(領春秋館事)을 겸하고 팔도지리지를 찬진하여 당대의 명상 황희와 더불어 조선초기 문화를 이룩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선생은 고려와 조선조에 걸쳐서 두 왕조를 역임하면서 청백리요, 어진 선비이며 훌륭한 정치가였다. 그가 거처하는 집은 너무 협소하고 초라하였다. 어느날 예조판서가 품할 일이 있어 상공가를 방문하였다가 마침 소나기를 만났는데 집의 곳곳이 비가 새고 있었다.
이것을 본 예조판서는 탄식하며 ‘재상의 집도 이러한데 내 어찌 바깥 행랑채를 짓겠는가?’하고 짓고 있던 행랑채 공사를 중지하고 말았다 한다. 공은 고향인 온양에 내왕할 때에도 지방관아에 들르지 않았으며 항상 간소한 차림과 단촐한 종복을 데리고 다녔다. 어느날 소를 타고 지나가니 양성과 진위등의 수령이 사람을 시켜 꾸짖어 금하였다. 선생이 ‘나는 온양의 맹고불(孟古弗)이다’하니 그곳 수령이 놀라고 당황하여 달아나다가 관인을 못에 빠뜨려 후에 그 못을 인침연(印沈淵)이라고 불렀다는 일화가 있다. 시문(詩文)에 능하고 음률에도 밝아 향악을 정리하고 스스로 제작하였다. 청백리가 되고 출천한 효자로서 효자정문이 세워졌다. 향년 72세에 세상을 떠나니 세종이 직접 임상하시고 문정(文貞)이라 시호(諡號)를 내렸다.
『경기문화재대관-도지정편』
『(청백리의 표상)고불 맹사성』
『광주군의 역사와 문화유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