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항선생묘(崔恒先生墓)는 경기도기념물 제33호로 소재지는 경기도 광주시 퇴촌면 도마리 산11-1번지이다.
조선 전기의 대신(大臣)이자 학자이며 정치가로서 훈민정음(訓民正音) 창제 때 큰 공을 세운 최항(1409~1474)을 모신 유택이다.
세종 16년(1434)에 장원급제한 후 집현전 학사가 되어 신숙주·박팽년·성삼문 등과 같이 훈민정음 창제에 참여하였고, 세종 27년(1445)에는 『용비어천가』를 한글로 풀이하였다. 단종 1년(1453) 계유정난 때 공을 세워 1등공신이 되었고 그 후로도 여러 관직을 두루 거쳐 영의정이 되었다. 선생은 40여 년간 조정에서 많은 벼슬을 역임하면서 『동국통감』, 『경국대전』, 『세종실록』, 『세조실록』 등 각종 편찬 사업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특히 문장력이 뛰어나 명나라와의 외교문서를 많이 작성하였고 서적들을 알기 쉽게 풀이하였다. 개인 저서로는『태허정집』,『관음현상기』가 있다.
봉분은 비교적 얕게 형성된 사성(沙城)이 둘러싸고 있으며, 봉분 전면 하단에는 화강암으로 반원형의 돌을 세워 봉분의 끝을 맺었다. 봉분 좌우측에는 신구(新舊)의 묘비, 전면에는 혼유석 · 상석 · 향로석이 모여 있고, 그 앞에 방형의 장명등이, 좌우로 문인석이 위치한다. 봉분을 향해 우측의 묘비는 묘역 설립 당시에 건립한 것이고, 상석과 그 좌측 묘비는 오석제(烏石制)로 그의 17대손이 설치한 것이다. 신도비는 건너편 금란산 밑에 위치하고 있다.
(자료출처 : 문화재청 / 『경기문화재총람-도지정편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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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내용 출처 : 광주시청
최항(崔恒, 1409∼1474)
최항선생은 조선 전기의 문신이자 학자이다. 선생의 자(字)는 정부(貞父), 호(號)는 동량(동梁), 시호(諡號)는 문청(文淸)이며 본관(本貫)은 삭령(朔寧)이다. 세종(世宗) 16년(1434) 알성시(謁聖試)에 장원급제하여 1443년 집현전(集賢殿) 학사(學士)가 되어 신숙주·박팽년·성삼문 등과 같이 훈민정음(訓民正音) 창제에 참여하였고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를 한글로 풀이하였으며, 『세종실록(世宗實錄)』, 『문종실록(文宗實錄)』을 편찬하였고, 『고려사(高麗史)』를 개찬(改撰)하였다.
단종(端宗) 원년(元年)(1453)에 승지(承旨)로 있으면서 계유정난(癸酉靖難)에 공을 세워 정난공신(靖難功臣) 1등이 되고, 도승지(都承旨)에 올랐다가 곧 이조참판(吏曹參判)이 되었다. 세조(世祖) 원년(1455)에 좌익공신(左翼功臣) 2등이 되고 형조(刑曹), 공조판서(工曹判書)를 역임하였다. 세조(世祖) 9년(1463)에 『동국통감(東國通鑑)』을 찬수하기 시작하였으며, 1466년 우의정(右議政)을 거쳐 영의정(領議政)이 되었다. 예종(睿宗) 원년(1469) 『경국대전(經國大典)』을 편찬하여 왕에게 바쳤다.
이처럼 선생은 조선 초기의 대표적인 학자 관료로서 문물제도의 정비에 큰 공을 세웠고, 『동국통감』, 『경국대전』, 『세종실록』, 『세조실록』 등 각종 편찬 사업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특히 선생은 역사(歷史), 어학(語學)에 조예(造詣)가 깊었으며 문장을 잘 지어 명(明)나라와의 외교 문서를 많이 지었다. 그의 개인 저서로는 『태허정집』, 『관음현상기』가 있다.
『경기문화재대관-도지정편』
『광주군의 역사와 문화유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