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립장군묘(申砬將軍墓)는 경기도기념물 제95호로 소재지는 경기도 광주시 곤지암읍 신대리 산15-1이다.
조선 중기의 무신인 충장공 신립(1546∼1592) 장군의 묘이다. 신립은선조 즉위년(1567) 무과에 급제한 뒤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선조 16년(1583) 북방에 쳐들어온 여진족 나탕개를 격퇴시키는 등 여진족의 계속되는 침입으로부터 6진을 지켰다. 이러한 공로로 1584년 함경도 병마절도사가 되었고, 1590년 평안도 병마절도사를 지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충청·전라·경상의 3도 순변사로 임명되었는데 아군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탄금대에서 배수진을 치고 왜군과 대결하였으며 싸움에서 크게 패하자 남한강에 투신 자결하였다. 죽은 후에는 벼슬이 영의정으로 높여졌다.
봉분은 단분이며 부인 전주최씨(全州崔氏)와의 합장묘이다. 봉분 앞에는 상석과 향로석이 있고, 상석을 중심으로 앞쪽으로 장명등이 있으며 좌우로는 동자상 · 망주석 · 문인석이 각 1쌍씩 배열되어 있다. 묘비는 봉분의 좌측에 위치하는데, 총 높이가 224cm로 큰 규모이며, 가첨석(加檐石) · 비신(碑身) · 기대(基臺)로 구성되어 있다. 가첨석은 팔작지붕형의 형태로 지붕 부분에 용(龍)이 정교하게 조각되었다. 기대의 측면에는 당초문(唐草紋)이, 상부 모서리에는 연화문(蓮花紋)이 장식되었다. 비문은 송시열(宋時烈 : 1607~1689)이 찬(撰)하고 신익상(申翼相 : 1634~1697)이 글을 써서 숙종(肅宗) 29년(1703)에 건립한 것이다.
(자료출처 : 문화재청 / 『경기문화재총람-도지정편2』)
내용 더보기
※ 아래내용 출처 : 광주문화원
신립(申砬, 1546∼1592)
장군의 자(字)는 입지(立之) 시호(諡號)는 충장(忠壯) 본관(本貫)은 평산(平山)이다. 아버지는 생원(生員) 화국(華國)이다. 선조 원년(1567)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선전관(宣傳官)을 거쳐 도총부도사(都摠府都事)를 지내고 진주판관(晋州判官)이 되었다. 선조 16년(1583) 은성부사가 되어 북변(北邊)에 침입해 온 이탕개를 격퇴하고 두만강을 건너가 야인들의 소굴을 소탕하고 돌아와 그 전공으로 함경도 북병사에 승진하고 얼마 뒤에 이탕개를 토멸(討滅)하였다. 그 후 선조 20년(1587) 흥양(興陽)에 왜구가 침입하니 경상우방어사가 되어 군사를 인솔하여 토벌하기도 하였다.
선조 23년(1590) 평안도 병마절도사, 다음해 한성부 부사가 되었고 임진왜란(1592)때 삼도순변사가 되어 빈약한 병력으로 출전하여 충주 탄금대에 배수진(背水陣)을 치고 적군과 대결하였으나 참패하여 부장 김여물(金汝勿)과 함께 강물에 투신 순국하였다.
이 당시에는 임금이나 백성 할 것 없이 모두 신립장군을 간성같이 믿고 있었던 터라 이 소식이 알려지자 임금은 곧 서울을 떠나게 되었다. 이보다 앞서 신립공이 북쪽 이탕개를 쳐서 그들의 소굴을 쓸어 없앴으므로 그 용명이 천하에 떨쳤으나, 이에 이르러 왜적이 나라를 침범해 와서 장차 중국을 충돌하려고 하니 그 병력은 대략 60만이나 되었다. 이때 우리나라는 태평을 누린지가 오래되어 크고 작은 벼슬아치들이 안일과 희락만을 일삼았는데 오직 문렬공. 조중봉헌이 왜적이 반드시 침입할 것을 알고 그들을 방어할 계책을 임금에게 올렸지만 모두들 미친 짓이라고 지목할 뿐이었다.
형세가 급박해지자 당시의 정승이 신립공을 파견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이를 거절하여 말하기를 ‘이 사람은 나의 조아(날카로운 발톱과 예리한 어금니)와 같이 믿음직해서 나를 호위해 줄 사람인데 어찌 보낼 수가 있는가’라고 하였다. 그러나 굳이 청하기를 마지않으므로 신립공을 불러서 물으니 신립공은 출전하기를 사양하지 않았다. 이때 제도에서 징발한 군사가 아직 도착하지 않았으므로 드디어 휘하 장졸과 일 없이 노는 사람들을 모아 병정으로 삼았으며 삼의사의 관원까지도 여기에 참가하였었고 무고(武庫)에서 병기를 내고, 또 조신(朝臣)들은 각각 전마를 내도록 명했었다.
김공 여물은 마침 어떠한 일로 옥에 갇혀 있었는데, 신립공이 자기 종사관으로 삼아 함께 떠나게 해줄 것을 청하였다. 신립공이 출발하려고 할 때 임금이 인견하고 친히 상방검을 내리면서 이르기를 ‘경상도 순찰사 이일(李鎰) 이하 모든 장병들은 이 칼로서 지휘하여 임무를 다하라’하였고 도 중로에서 병졸을 모으게 했었는데 충주에 이르니 군중은 수천에 불과하고 이일은 상주에서 패주해 왔었다.
신립공이 처음에는 이일을 목 베어 조리돌리려 하다가 그를 가석히 여겨 중지하고 이어 왜적을 막아낼 계략을 물으니 이일이 대답하되 ‘병력의 차이가 너무도 크므로 여기서 대적할 것이 아니라 그대로 후퇴해서 서울을 지키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하였다. 이에 공이 꾸짖으며 말하기를 ‘네가 감히 다시 아군을 교란시키려고 하느냐, 다만 앞으로나마 공을 세워 충성을 맹세하라’하고 그를 선봉으로 삼았다.
이때 김여물이 먼저 조령에 의거하기를 청하니 공은 왜적들이 이미 조령밑까지 육박해 있을 것으로 추산하고, 이어 말하기를 ‘지금 떠났다가 오령까지 당도하지 못하고 서로 부딪히게 되면 사태는 위급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아군은 모두 훈련되지 못한 병정인데다 또한 평소에 친근히 따르던 자들이 아니기 때문에 사지에 끌어 들이지 않으면 그들의 도움을 바랄 수가 없을 것이다.’하고 마침내 달천을 배후에 두고 진을 쳤었다.
생각건대 공은 평지에서 기병을 급히 몰아 그들을 짓밟음으로써 소수의 병력으로 많은 적군을 뚫으려고 했던 것이리라. 그러나 적들은 벌써 오령을 넘어와서 산과 들에 가득차니 검광은 햇빛을 가리고 포성은 땅을 뒤흔들었다. 공이 제군을 지휘하여 진격하면서 두 번이나 친히 적군을 돌파하려고 했으나 들어갈 수가 없었다. 적들은 먼저 아군의 우측을 포위하고 동쪽, 서쪽에서 협공하니 그 형세는 마치 태산이 누르는 듯하였다. 이에 공은 다시 탄금대로 되돌아 와서 김여물에게 말하기를 ‘이제는 남아답게 죽을 뿐이오 대의에 있어 구차하게 살수는 없소’하자 김공은 말하기를 ‘내 또한 공을 따르리라’하였다. 드디어 김공에게 장계(狀啓)를 부하를 시켜 이를 서둘러 임금에게 올리게 한 다음 함께 적진에 육박하여 10여명을 쳐서 죽이고 끝내 김여물과 더불어 강물에 투신하여 죽었다.
『경기문화재대관-도지정편』
『1996 광주군 문화유적 현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