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자수선생묘(金自粹先生墓)는 경기도기념물 제98호로 소재지는 경기도 광주시 오포읍 신현리 산120-1이다.
고려의 문신인 상촌(桑村) 김자수선생의 묘소이다. 고려 공민왕 23년(1374)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우왕 초에 사간원의 정언이 되었다. 이때 왜구 토벌의 공로로 포상받은 조민수의 사은편지에 회답하는 교서를 지으라는 왕명을 받았으나, 조민수가 왜구와의 전투에서 도망쳐 많은 병사를 죽게 하였다고 이를 거절하여 전라도 돌산에 유배되었다. 공양왕 4년(1392) 충청도 관찰사·형조판서에 이르렀으나, 고려말 정세가 어려워지자 모든 관직을 버리고 고향인 안동에 은거하다가, 무덤에 비석을 세우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고 자결하였다.
봉분 앞에는 혼유석 · 상석 · 향로석이 있고, 그 앞에 장명등이 위치하고 있으며 묘역 좌우로 석양(石羊)과 망주석이 1쌍, 문인석이 2쌍 배열되어 있다. 상석 좌우에 세워진 문인석은 높이 80cm로 작은 크기이며 고졸(古拙)한 느낌이다. 양식으로 보아 조선 초기의 것으로 생각되며, 묘역 앞쪽의 문인석은 금관조복(金冠朝服)의 형태로 조선 후기의 양식이고, 그 밖의 석양 · 장명등 · 상석 등의 석물은 근래에 세운 것이다. 묘비는 그의 유언으로 세우지 않았다. 신도비(神道碑)는 땅에 묻혀 있던 것을 1926년에 후손들이 발굴하였으나 비문의 마모가 심하여 새로 채유후(蔡裕後)가 찬(撰)하여 건립하였다.
(자료출처 : 문화재청 / 『경기문화재총람-도지정편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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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내용 출처 : 광주문화원
김자수(金子粹, 생몰년대 미상)
김자수 선생은 증예조참의(贈禮曹參議) 오의 아들로 고려 충정왕 3년(1351)에 경상도 안동부에서 출생하였는데 자(字)는 순중(純仲), 호는 상촌(桑村)이다. 공은 효성이 지극하여 편모 봉양에도 극진하였을 뿐만 아니라 병환중 시탕(侍湯)에도 온 정성을 다하였고 별세 후에는 3년간 시묘(侍墓)하였으며 왕실에서 효자정려(孝子旌閭)를 내렸다. 그 후 문과(文科)에 장원급제하여 좌정언직(左正言職)에 승진하였다.
당시 경상도 도순문사 조민수의 포상문제를 논의할 때 반대한 것이 화근이 되어 고도(孤島) 돌산(突山)으로 정배되었다가 4년만에 풀려나 복직되었다. 공양왕 4년(1392)에 이성계가 정권을 장악하고 국호를 조선으로 칭하는 변혁이 일어나자 공은 안동으로 귀향하여 두문불출하였다.
조선조에 와서 공의 도덕과 경륜을 아껴 누차에 걸쳐 헌장(憲長 : 현 검찰총장)으로 초청하였으나 불응하였는데 태종이 노하여 다시 공을 형조판서로 제수하여 급히 부임하라 명하나 그는 탄식하며 말하기를 ‘내 평생에 충효에 뜻을 두고 스스로 격려하였거늘 지금 태종에게 굴복하면 이것은 의리가 아니라 지하에 가서 선왕과 부모를 어찌대하랴’하고 내가 죽을 때가 왔다고 하며 수의와 장례기구를 마련해서 아들을 배종케 하고 출발하였다.
수일만에 광주(廣州) 추령(현 태재고개)에 도착하자 말에서 내려 ‘포은(圃隱)의 묘소가 있는 곳이니 내가 죽을 땅은 이 곳이다. 여자도 불경이부(不敬二夫)하거늘 하물며 신하가 되어 두 성의 왕을 어찌 섬길 수 있으랴’하고 아들 근에게 ‘나는 이 곳에서 죽겠다’하고 유언을 하기를 ‘이 곳에 매장하고 행적을 금석(金石)에 새기지 말며 나무뿌리 썩듯이 내버려 두어서 널리 알리지 않도록 하라. 널리 알리게 되면 무인(武人) 투성이인 신조정에서 자손들에까지 해를 미치게 할 것이 염려된다’는 말을 남기고 음독자진하였다. 때는 태종 13년(1413) 11월 14일 이었으며 향년 63세였다.
『경기문화재대관-도지정편』
『상촌선생실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