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익희생가(申翼熙生家)는 경기도기념물 제134호로 소재지는 경기도 광주시 초월읍 서하길 6-25이다.
이 가옥은 해방 전후 시기 대표적인 정치 지도자로서 광복 후 제헌국회(制憲國會) 부의장, 국회의장을 역임한 해공(海公) 신익희(1894~1956)의 생가이다. 원래는 지금 위치에서 동남쪽으로 약 200m 지점에 가옥이 있었으나, 고종(高宗) 2년(1865) 을축년(乙丑年) 대홍수로 집이 파손되어 고종 4년경(1867)에 현 위치로 이전하였다고 전한다. 그러나 건축물대장에는 1925년에 건축되었다고 기재되어 있다.
가옥은 안채와 바깥채로 구성되어 있으며 모두 목조 기와집으로 전통 한옥의 외관을 잘 간직하고 있다. 안채는 전체적으로 T자형을 이루는데 중앙의 2칸 대청을 중심으로 우측에 안방, 좌측으로 건넌방을 두었고 안방 앞으로 부엌을 두었다. 바깥채는 ㄱ자형으로 가운데에 대문을 두고 좌측에 2칸의 사랑방을 두었다.
이 집은 전체적으로 전형적인 19세기 또는 20세기 초 경기 지역 중소 지주 계층의 가옥 형태를 취하고 있다. 그러나 기둥의 일부 부재를 제외하면 전체적으로 부재가 가늘고 치목 수법도 오랜 것이 아니어서 적어도 20세기 초에 들어와 크게 개축된 것으로 짐작된다.
(자료출처 : 『경기문화재총람-도지정편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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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내용 출처 : 광주시청
신익희(申翼熙, 1894∼1956)
독립운동가이자 정치가였던 신이희 선생은 초월읍 서하리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평산(平山), 이명은 왕방평(王邦平), 호는 해공(海公)이다. 아버지는 장례원경(掌隷院卿) 단(檀)이고, 어머니는 정경랑이다.
1908년 한성관립외국어학교 영어과를 입학하여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였고, 1913년 일본에 유학하여 1916년 와세다대학 정경학부를 졸업하였다. 와세다대학 재학 중 송진우, 안재홍 등과 지역적으로 나뉘어 있던 조선학생단체들, 즉 철북구락부, 명서친목회, 호서다화회 등을 묶어 ‘조선유학생학우회’라는 하나의 단체로 통일하였다.
이 단체에서 그는 총무, 평의회장 등의 직책을 맡으며 기관지 『학지광(學之光)』의 발간에 간여하였다. 일본 유학을 마친 후 귀국하여 고향인 광주에 동명강습소(東明講習所)를 설립하여 개화사상을 가르쳤다. 1917년 중동학교(中東學校)에서 잠시 교편을 잡았다가 보성전문학교의 전신인 보성법률상업학교에서 강의를 하였다.
1919년 김시학, 윤치호, 이상재, 이승훈 등과 함께 「독립선언서」를 작성하여 민중 봉기할 것을 협의한 후 대내외적으로 거족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북경, 남경, 상해 등지를 돌며 동지를 규합하였다. 1919년 3․1운동에 참여하였고, 3월 상해로 망명길에 올랐으며, 그로부터 1945년 광복이 될 때까지 26년간 임정을 지켰다. 당시 상해는 일제의 횡포 및 압제를 덜 받을 수 있는 곳일 뿐 아니라 이미 오래전부터 독립운동의 기반을 닦아온 동제사(同濟社)의 조직 및 신한청년단의 활동이 널리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독립운동 장소로서는 좋은 곳이었다.
신익희는 이동녕, 이시영, 신규식 등 동지들과 함께 상해 프랑스 조계 보창로(寶昌路)의 허름한 집을 임시 사무소로 정하고 임시정부 조직을 위한 비밀회의를 개최하였다. 그 결과 4월 10일 상해에 모인 각 지방 출신과 대표자들을 의원으로 하는 임시의정원 회의를 열고 국호, 관제, 정부관원 등을 의결 선포함으로써 역사적인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탄생을 맞이하게 되었다. 신익희는 이 회의에 경기도 대표위원 자격으로 참석하여 내무분과 및 외무분과 위원에 피선되어 임시헌장 10개 조를 제정하는 데 참여하였다.
그는 상해에 있는 동안 대한민국 임시헌법을 기초하고 임시정부의 초대 대의원과 초대 내무차관을 지냈으며, 그 후 내무총장, 법무총장, 문교부장, 외무부장 등 요직을 두루 맡았고, 국무원 비서실장과 의정원 부의장을 겸임하였다. 한때는 중국군 육군중장을 겸하기도 했고, 의열단(義烈團) 단장 김원봉과 함께 조선의용대를 결성하기도 했다.
또한 1929년에는 남경에서 민병길․윤기섭․김홍일 등과 함께 민족독립진영의 단결을 위해 한국혁명당을 조직하기도 했고, 그 후 한국독립당에 참여해 김구, 김규식 등과 가깝게 지냈다. 1935년에는 주의와 사상을 초월한 독립운동전선의 통일을 절실히 느끼고 민족혁명당 결성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민족혁명당도 오래 지속되지 못하고 분열되자 1937년 김인철 등과 함께 조선민족투쟁동맹을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1945년 12월 임시정부 제2진으로 조소앙 등과 함께 귀국하여 곧바로 대한독립촉성국민회를 만들어 부회장을 맡았으며, 1946년 봄 대한반공연맹을 조직해 이사장에 취임하는 한편 국민대학 초대 학장과 자유신문사 사장, 대한체육회 회장직도 맡았다. 그 후 미군정하의 남조선과도입법의원, 의장을 거쳐 정부수립과 함께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소속으로 광주에서 출마했는데 그의 명성이 워낙 높아 무투표 당선되었다.
제헌국회에 진출한 그는 초대 국회의장이었던 이승만의 뒤를 이어 국회의장이 되었다. 1947년에는 대한국민당을 결성하여 대표최고위원이 되었으며, 1949년 한국민주당과 합당, 개편된 민주국민당의 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동안 그는 3선 국회의장으로 정치적 비중을 더해갔으며, 사사오입 개헌으로 이승만이 국민들에게서 멀어지자 1956년 야당의 대통령 후보로 출마하였다. 그해 5월 2일 한강 백사장에서 열린 그의 유세는 폭발적인 인기를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그로부터 3일 후인 5월 5일 호남지방에서의 유세를 위하여 전주로 가던 중 기차 안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하였다. 5월 23일 국민장으로 장례를 치렀으며 서울 우이동에 안장되었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초월읍 서하리의 생가는 1992년 12월 31일 경기도기념물 제134호로 지정되었고, 그가 마지막으로 살았던 종로구 효자동 집 역시 2005년 2월 11일 서울시기념물 제23호로 지정되었다.
『문화재안내문안집2』
『경기문화재대관-도지정편』
『역사와 문화의 향기-인문, 사건, 유적, 유물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