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흠묘역및신도비(申欽墓域및神道碑)는 경기도기념물 제145호로 소재지는 경기도 광주시 퇴촌면 영동리 산12-1이다.
조선 선조(宣祖)~인조(仁祖) 연간의 문신이며 한문학의 정종(定宗)으로 칭송되었던 신흠(1566~1628)을 모신 유택이다. 신흠은 선조 18년(1585) 진사시(進士試)와 생원시(生員試)에 차례로 합격하고, 이듬해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하였으나 이이(李珥 : 1536~1584)를 두둔한 말로 인하여 당시 정권을 장악한 동인(東人)으로부터 이이의 무리라는 배척을 받고 겨우 종9품직인 성균관학유(成均館學諭)에 제수되었다가 곧 경원훈도(訓導), 광주훈도를 거쳐 감찰(監察), 병조좌랑(兵曹佐郞) 등을 역임하였다. 임진왜란(1592~1598) 때는 정철(鄭澈 : 1536~1593)의 종사관(從事官)으로 활약하여 지평(持平)으로 승진되고, 이어 사성(司成), 대사간(大司諫), 부제학(副提學), 병조판서(判書) 등을 역임하였다. 광해군(光海君) 때는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 예조판서 등을 역임하고, 인조 때에 예문관(藝文館), 홍문관(弘文館)의 대제학(大提學), 우의정,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올랐다. 그는 장중하고 간결한 성품과 뛰어난 문장으로 인하여 선조의 신망을 받으면서 항상 문한직(文翰職)을 겸임하였다. 또한 대명 외교 문서의 제작, 시문의 정리, 각종 의례 문서의 제작에 참여하는 등 문운(文運)의 진흥에 크게 기여하였다.
봉분은 단분으로 부인 전의이씨(全義李氏)와의 합장묘이다. 묘역은 사성(沙城)으로 둘러져 있고, 봉분 앞에는 묘비 · 상석 · 향로석이 가까이 모여 있다. 상석 전방에는 장명등이 있으며, 상석과 장명등을 중심으로 좌우에 망주석과 문인석이 배열되어 있다. 묘비는 인조 6년(1628)에 건립된 것으로 후면에 그가 손수 작성한 비문이 세워져 있다. 숙종(肅宗) 25년(1699)에 건립된 신도비는 묘역의 동남쪽 약 200m 지점 묘역 입구에 세워졌는데, 이수(螭首) · 비신(碑身) · 기대(基臺)로 구성되었다. 총 높이 335cm의 대형이면서도 전체적으로 안정감 있는 비례 감각과 세부적으로 생동감 있는 조각 표현 등이 뛰어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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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내용 출처 : 광주시청
신흠(申欽, 1566∼1628)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경숙(敬叔), 호는 현헌(玄軒), 상촌(象村), 현옹(玄翁), 방옹(放翁)이다. 아버지는 개성도사 승서(承緖)이고, 어머니는 은진송씨(恩津宋氏)로 좌참찬 인수(麟壽)의 딸이다. 송인수와 이제민(李濟民)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585년(선조 18) 진사시와 생원시에 차례로 합격하고 1586년 승사랑(承仕郞)으로서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으나, 1583년에 외숙 송응개(宋應漑)가 이이(李珥)를 심히 비판하는 탄핵문을 보고 “이이는 사림(士林)의 중망을 받는 인물이니 심하게 비난하는 것은 불가하다”고 한 말로 인하여 당시 정권을 장악한 동인으로부터 이이의 당여라는 배척을 받고 종9품직인 성균관학유에 제수되었으며, 곧 경원훈도(慶源訓導)로 나갔다가 광주훈도(廣州訓導)를 거쳐 사재감참봉이 되었다.
1589년 춘추관 관원에 뽑히면서 예문관봉교, 사헌부감찰, 병조좌랑 등을 역임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의 발발과 함께 동인의 배척으로 양재도찰방(良才道察訪)에 좌천되었으나 전란으로 부임하지 못하고, 삼도순변사(三道巡邊使) 신립(申砬)을 따라 조령전투에 참가하였고, 도체찰사(都體察使) 정철(鄭澈)의 종사관으로 활약하였으며, 그 공로로 지평으로 승진되었다. 1593년 이조좌랑에 체직, 당시의 폭주하는 대명외교문서 제작의 필요와 함께 지제교(知製敎)․승문원교감을 겸대하였다.
1594년 이조정랑으로서 역적 송유진(宋儒眞)의 옥사를 다스리고 그 공로로 사복시첨정으로 품계가 승진되었으며, 곧 집의에 초수(超授)되었다. 같은 해 광해군의 세자책봉을 청하는 주청사 윤근수(尹根壽)의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명에 다녀와 그 공로로 군기시정에 제수되었다.
1595년 함경도어사와 의정부사인을 거쳐 장악원정, 성균관사예, 종부시정, 세자시강원필선, 홍문관교리, 홍문관응교, 의정부사인, 홍문관전한을 차례로 역임하였다. 1599년 선조의 총애를 받아 장남 익성(翊聖)이 선조의 딸 정숙옹주(貞淑翁主)의 부마로 간택됨과 함께 동부승지에 발탁되었고, 같은 해 형조참의 겸 승문원부제조를 거쳐 병조참지, 우부승지, 이조참의, 예조참의, 대사간, 병조참의를 역임하였다.
1601년 『춘추제씨전(春秋諸氏傳)』을 합찬한 공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승진되고 예문관제학이 되었다. 1602년 충무위부호군(忠武衛副護軍)으로 좌천되었다가 곧 오위도총부부총관을 거쳐 예조참판에 발탁되었고 이어서 병조참판, 홍문관부제학, 성균관대사성, 도승지, 예문관제학, 병조참판, 도승지를 차례로 역임하였다.
1604년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오르면서 한성부판윤이 되었고, 그 뒤 병조판서, 예조판서, 상호군, 경기관찰사 등을 역임하였다. 1608년(광해군 즉위) 선조애책문(宣祖哀冊文)을 짓고 한성부판윤, 예조판서를 역임하였다. 이듬해 세자의 책봉을 청하는 주청사가 되어 명에 다녀왔으며 그 공로로 숭정대부(崇政大夫)에 승자되었고, 1610년에는 동지경연사, 동지성균관사, 예문관대제학을 겸대하였다. 그러나 1613년 계축유사가 일어나자 선조로부터 영창대군(永昌大君)의 보필을 부탁받은 유교칠신(遺敎七臣)으로 이에 연루되어 파직되었다.
1616년 인목대비(仁穆大妃)의 폐비 및 이와 관련된 김제남(金悌男)에의 가죄(加罪)와 함께 다시 논의된 뒤 춘천에 유배되었다가 1621년에 사면되었다. 1623년(인조 1) 3월 인조의 즉위와 함께 이조판서 겸 예문관, 홍문관의 대제학에 중용되었고 같은 해 7월에 우의정에 발탁되었으며,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좌의정으로서 세자를 수행하고 전주에 피난하였으며 같은 해 9월 영의정에 올랐다가 죽었다.
학문에 전념하여 벼슬하기 전부터 이미 문명을 떨쳤으며, 장중하고 간결한 성품과 뛰어난 문장으로 인하여 선조의 신망을 받아 항상 문한직(文翰職)을 겸대하고 대명외교문서의 제작, 시문의 정리, 각종 의례문서의 제작에 참여하였다. 사림의 신망을 받았으며, 이정구(李廷龜), 장유(張維), 이식(李植)과 함께 조선 중기 한문학의 정종(正宗) 또는 월, 상, 계, 택(月, 象, 谿, 澤)으로 칭송되었다.
신흠묘역 및 신도비는 1994년 4월 20일 경기도 기념물 제145호로 지정되어 조선 중기 사대문장가(四大文章家)로 한세대를 풍미한 선현의 일생을 조명하고 있다. 신흠은 1651년(효종 2) 인조 묘정에 배향되었고, 강원도 춘천의 도포서원(道浦書院)에 제향되었다. 편저서로는 『상촌집(象村集)』, 『야언(野言)』 등과 「낙민루기(樂民樓記)」 외 여러 편이 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