곤지암(昆池岩)은 경기도문화재자료 제63호로 소재지는 경기도 광주시 곤지암읍 곤지암로 72이다.
곤지암은 조선 선조 때의 명장인 신립 장군에 얽힌 전설이 있는 바위이다. 신립(1546∼1592)은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어려서부터 글읽기보다는 무예닦기를 좋아했다. 23세 때 무과에 급제한 후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이 터졌을 때에 많은 공을 세웠다. 1592년 임진왜란이 막 일어났을 때만 해도 조선 조정은 대수롭지 않 게 여겼다. 신립(申砬)을 도순변사로 임명하여 왜군을 막으려 했다. 신립이 싸움터로 떠날 때 선조는 친히 칼을 하사하면서 격려하였다. 그러 나 신립이 이끄는 병사들의 수는 몇 백 명에 불과하였다. 그만큼 조정 에서는 전쟁에 대한 준비도 없었고 왜군을 무시하였던 것이다.
신립은 전쟁터에 나가면서 걱정이 많았다. 대부분의 병사들은 훈련도 받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왜군과의 싸움 경험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적의 능력을 알 수가 없어 착잡한 마음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병사들을 이끌고 충주에 도착하니 종사관 김여물(金汝)이 조령에 진지를 구축하고 있었다. 신립은 “적은 이미 고개 밑에 도착해 있으니 새재(조령)에서 싸우는 것은 위험하다. 더구나 우리 병사들은 훈련이 안 되었으니 사지(死地)에 갖다 놓기 전에는 용기를 내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며 평지에 배수진을 칠 것을 명하였다.
김여물은 새재를 점령하여 지키거나 높은 언덕을 이용하여 역습하자고 주장했으나 신립은 받아주지 않았다. 결국 충주의 달천(達川)을 등지고 탄금대(彈琴臺)에 진을 쳤다. 왜군이 조령을 넘어 진을 치니 그 수와 위용은 가히 놀라울 지경이었다. 신립은 몸소 군사를 이끌고 적진을 돌파하려 했으나 적이 너무 강해 뜻을 이룰 수 없었고 오히려 양 측면에서 적의 협공을 받게 되었다. 신립은 탄금대 진으로 후퇴한 후 조정에 알리는 글을 남긴 후 김여물과 함께 적진으로 돌격, 10여 명을 죽이고 두 사람 다 강에 투신하여 죽었다. 얼마나 원통하고 분했던지 병사들이 물속에서 끌어낸 그의 모습이 두 눈을 부릅뜨고 당장이라도 호령할 것 같은 기세를 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병사들이 장군의 시체를 이곳 광주로 옮겨 장사지낸 후부터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묘지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고양이를 닮은 괴이한 모양의 커다란 바위 하나가 있었는데 누구든 말을 타고 이 근처를 지나갈 때마다 말굽이 땅에 붙어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니 어쩔 수없이 말에서 내려 걸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중 한 장군이 근처를 지나다가 이 이야기를 듣고 신립의 묘에 찾아가 호통을 쳤다. 왜 지나는 사람들을 괴롭히느냐고 핀잔한 것이다. 그러자 갑자기 폭우가 쏟아지고 천둥이 치면서 바위의 윗부분에 벼락 이 떨어졌다. 벼락에 바위가 쪼개져 괴이한 모습은 없어지고 그 옆에 연못이 크게 생겼으며 괴이한 현상이 더 이상 일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이때부터 사람들은 이곳을 큰연못바위(곤지암)이라고 불렀다.
이 바위는 큰 바위와 작은 바위 두 개가 조금 떨어져 놓여 있다. 바위 위쪽으로는 약 400년 된 향나무가 자라고 있는데, 서로 어우러져 신비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바위 주변에 있었던 연못터는 지금은 학교와 주택가로 변하여 그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자료출처 : 문화재청 / 경기문화포털)
『경기문화재총람-도지정편(1~3)』
『(경기도 역사와 문화) 설화와 민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