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명 영회원(光明 永懷園)은 사적 제357호로 소재지는 경기도 광명시 노온사동 산141-20번지이다.
조선 인조(仁祖)의 맏아들이며 효종(孝宗)의 형인 소현세자(昭顯世子 : 1612~1645)의 빈 민회빈 강씨(愍懷嬪姜氏)의 묘이다. 빈은 고려조의 공신 강감찬(姜邯贊 : 948~1031)의 18대 손인 문정공(文貞公) 강석기(姜碩期 : 1580~1643)의 딸로 인조 5년(1627) 세자빈이 되었으나 세자가 승하한 후 모략으로 폐빈이 되었고 인조 24년3월 15일 사약을 받고 죽었다. 숙종(肅宗) 44년(1718) 4월 세자빈의 무고함이 판명되어 복위되고 고종(高宗) 7년(1870) 영회원으로 개칭하였다.
봉분 둘레에는 호석(護石)이 없고 능 주위에 곡장(曲墻)이 둘려있으며, 봉분 앞에 상석(床石)과 4각형 장명등(長明燈) 그리고 1쌍의 문인석이 있다.
※ 광주(廣州) 영회원→광명(光明) 영회원 명칭변경(2011.08.22. 문화재청 고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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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내용 출처 : 문화재청 / 경기문화포털
능, 원, 묘의 구분
왕족의 무덤은 왕실의 위계에 따라 능, 원, 묘로 분류된다.
1. 능(陵) : 추존왕, 추존왕비를 포함한 왕과 왕비의 무덤
2. 원(園) : 왕세자와 왕세자비, 그리고 왕의 사친(私親 : 종실로서 임금의 자리에 오른 임금의 생가 어버이)의 무덤
3. 묘(墓) : 나머지 왕족, 즉 왕의 정궁의 아들, 딸인 대군과 공주, 왕의 서자, 서녀인 군과 옹주, 왕의 첩인 후궁, 귀인 등의 무덤
비운의 세자빈 강씨와 영회원(永懷園)
민회빈은 소현세자의 부인인 강빈(姜嬪)을 말하는데, 인조 대에 우의정을 지낸 강석기의 따님이다. 민회빈이 소현세자와 가례를 올린 것은 1627년(인조 5) 12월인데, 그 해 봄에 정묘호란이 일어났다가 가까스로 수습된 직후였다. 이후 민회빈의 생애는 그야말로 고난의 세월이었다. 중국에서 명나라와 청나라가 교체되고 그 여파가 조선에 미쳐 두 차례의 호란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병자호란이 일어나 1637년 1월에 인조가 항복을 하자 소현세자 부부는 청나라의 인질이 되었고, 이후 고국으로 돌아오기까지 꼬박 8년간을 청나라에서 머물렀다. 소현세자 부부가 심양관에 머무는 동안, 세자는 조선과 청나라 사이의 외교를 담당했고 민회빈은 심양관의 안살림을 맡았다. 당시 심양관에는 세자와 봉림대군 부부를 비롯하여 수백 명의 식구가 있었는데 이들을 제대로 건사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경영 능력이 필요했다. 다행히도 민회빈은 뛰어난 능력을 보였는데, 그녀는 청나라가 제공한 토지에 농사를 짓는 한편 조선과 청의 무역에 관여하여 조금씩 부를 축적해 나갔다. 그러나 민회빈의 경영 능력은 훗날 조선 왕실의 의심을 사게 된다.
1643년 6월, 민회빈의 부친인 강석기가 사망했다. 청 황실이 소현세자의 일시 귀국을 허락하자 세자는 민회빈의 동행을 요구했고, 이듬해 1월에 세자 부부는 서울 땅을 밟을 수 있었다. 그러나 민회빈은 친정에 가서 부친의 빈소에 참배하거나 모친을 만나지 못했는데, 인조가 세자 부부의 방문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무렵 인조는 세자가 청 황실과 결탁하여 자신의 왕위를 위협한다고 느끼고 있었다. 속절없이 심양으로 돌아가는 길에 민회빈은 병을 앓았다.
1645년 2월, 소현세자 부부가 영구 귀국을 한 이후에도 불행은 계속되었다. 소현세자는 귀국한지 2개월 만에 독살로 의심되는 죽음을 맞았고, 얼마 후 봉림대군이 세자로 책봉되었다. 소현세자와 민회빈 사이에는 원손(元孫)이 있었지만 왕위를 계승할 기회는 사라졌다. 그러다가 1646년 3월에는 민회빈이 죽음을 맞았다. 인조를 저주하고 국왕 수라에 독약을 넣은 사건의 주모자로 의심을 받았기 때문이다. 사건의 여파는 계속되어, 민회빈의 노모와 4형제가 처형되거나 고문으로 사망했고, 인조의 손자이기도 한 그녀의 세 아들은 제주도로 귀양을 갔다가 두 명이 사망했다. 인조와 세자의 갈등, 인조의 총애를 받던 조소용과 민회빈의 갈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민회빈은 숙종 대에 와서야 억울함을 벗게 된다. 1718년(숙종 44)에 숙종은 그녀를 민회빈(愍懷嬪)으로 복권시켰고, 묘소의 이름을 민회원(愍懷園)으로 정했다. 이 때 민회빈의 신주는 이현궁(梨峴宮)에 있던 소현세자의 사당에 합쳐졌는데, 숙종은 특별히 제문을 지어 영혼을 위로했다. 1797년(정조 21)에는 정조가 민회원을 방문하여 제사를 지냈는데, 정조는 김포의 장릉을 방문한 다음 인천, 부평을 거쳐 안산으로 가던 길이었다. 이 때 정조는 민회빈과 강석기를 위한 제문을 지었는데, 다음은 민회빈을 위해 지은 제문이다.
명가에서 덕을 길러 우리 왕실에 출가했는데
부귀에서 점차 멀어지고 창상의 변고를 어찌 차마 말하리오.
아득한 샘의 근원은 실로 무덤에서 가까운데
소나무 잣나무는 일찍이 자라지 않았네.
내가 일을 벌여 봉분을 돋우고 나무를 심었으며
무덤에 와 절하고 예주(醴酒)를 가득 따르네.
민회원은 1870년(고종 7)에 영회원(永懷園)으로 이름이 바뀌어 오늘에 이른다.
영회원은 현재 경기도 광명시 노온사동에 있다. 제2경인고속도로 광명 IC에서 서울방향으로 나가다 첫 번째 만나는 사거리에서 우회전하여 700m 정도를 가면 영회원 안내판이 나타난다. 이곳에서 커다란 저수지를 끼고 1km 정도를 걸으면 영회원이 보이는데, 묘소 입구에는 오랜 풍상을 견딘 느티나무 고목이 있다. 영회원은 사적 357호로 지정되어 있다. 참고로 소현세자의 묘소인 소경원(昭慶園)은 고양시 서삼릉의 경역 안에 있다.
민회빈이 묻힌 곳은 원래 친정인 금천(衿川) 강씨의 묘역이었다. 저수지에서 영회원에 이르는 길가에 있는 비석은 강석기의 신도비이고, 그 오른쪽 산자락에는 금천 강씨의 문중 묘소가 조성되어 있다. 이곳에는 민회빈의 부친인 강석기 부부는 물론이고 그녀의 동생으로 함께 화를 당했던 강문성, 강문두, 강문벽의 묘소도 있다. 강문성은 김광현의 사위였는데, 김광현은 병자호란 때 강화도에서 사망한 김상용의 아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