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리이원익영우(梧里李元翼影宇)는 경기도유형문화재 제161호로 소재지는 경기도 광명시 오리로347번길 5-6이다.
조선 선조(宣祖)~인조(仁祖)때 영의정을 지내고 청백리로 이름 높던 오리 이원익(1547~1634) 선생의 영정(影幀)이 봉안되어 있는 사당이다. 인조8년(1630)에 2칸 초가인 선생의 집에서 비가 새므로 왕이 새 집을 하사하였고, 숙종(肅宗) 19년(1693) 인조가 하사한 집터 위에 사당을 건립하여 `오리영우(梧里影宇)‘라 편액하였다.
오리영우는 소하동 오리로변의 주택가에 있는 충현서원(忠賢書院)내에 종택(宗宅)과 함께 남향으로 자리잡고 있다. 사당 주변에는 담장이 둘러져 있고 앞쪽에는 내삼문(內三門)이 있어 별도의 영역을 이루고 있다. 사당은 정면1칸, 측면2칸의 익공계(翼工系) 맞배집으로, 평면은 정방형인데 전면의 퇴칸 때문에 측면은 2칸이 되었다. 전면 창호(窓戶)는 세살분합문이고, 측면과 후면에는 방화벽이 설치되었다. 장대석(長臺石) 기단과 초석은 17세기의 것으로 추정되지만 세장한 부재단면, 익공의 형태, 방화벽 등은 19세기 말의 수법이다. 구조는 앞쪽에 퇴칸이 있는 오량(五梁) 가구이며 내부에 영정이 봉안된 감실(龕室)이 있어 특이하다. 내삼문은 평삼문 형식인데 기둥 머리의 결구 수법에서 지역적 특성을 보이고 있다.
오리영우는 작은 규모의 사당이지만 조선 후기의 전형적인 사당 형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자료출처 : 문화재청 / 『경기문화재총람-도지정편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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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내용 출처 : 경기문화포털
이원익(李元翼, 1547~1634)
오리 이원익(李元翼; 1547~1634)이 활동한 시기는 조선의 성리학이 퇴계·율곡으로 대표되는 두 명의 사상가에 의해 꽃피우던 시기였다. 이원익도 이와 같은 시대적 배경을 바탕으로 성리학적 사상에 입각하 여 활동하였으나 백성의 삶을 개선하고 실질적인 정책을 구현하는 데 중점을 둔 경세가로서의 면모가 더 드러나는 인물이다. 더구나 조선 시대 최대의 국난이라 할 수 있는 임진왜란을 비롯해 인조반정, 정묘호란 등의 위기를 모두 겪으며 온갖 경륜을 펼쳐보였다.
이원익의 본관은 전주(全州)이 고, 자는 공려(公勵), 호는 오리(梧里),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태종의 12번째 아들인 익녕군 이치의 4세손으로 함천군 이억재(李億載)의 아들이다. 이원익의 세계는 익녕군 이치 – 수천군 이정은 – 청기군 이표 – 함천군 이억재 – 이원익으로 이어졌는데 오늘날 광명시 소하동에 익녕군의 부인인 군부인 조씨의 무덤을 모시면서 이 지역에 정착하게 되었다. 소하동에는 이원익을 비롯한 전주 이씨 가문의 선산이 조성되어 있다.
이원익이 자신의 호를 딴 오리(梧里)는 소하동에서 현재 광명시 가학동으로 넘어가는 곳의 지명으로 이원익 가문에 전해져 내려오는 옛 지도(군부인조씨세장도)에도 오리곡이라는 이름으로 기록되어 있다. 또한 소하동 설월리(또는 서월리鋤月里)는 구전에 따르면 이원익이 달빛 아래 호미로 김을 매던 곳이라고도 전하는 등 이원익과의 연고성이 강한 지역이다.
이원익은 23세에 과거에 급제한 후 오랜 관직생활을 하며 유능한 관리로서의 면모를 보였는데, 먼저 안주목사로 재임하며 보여준 헌신과 능력을 들 수 있다. 41세에 안주목사에 기용되자 그는 양곡 1만여 석을 청하여 기민을 구호하고 종곡(種穀)을 나누어주어 생업을 안정시키고, 또 병졸들의 훈련근무도 연4번의 당번에서 6번제로 고쳐 시행하였다. 이는 군병을 넷으로 나누어 1년에 3개월씩 근무하게 하던 것을, 1년에 2개월씩 하게 함으로써 백성들의 부담을 경감시킨 것이다. 이 6번 입번 제도는 그 뒤 순찰사 윤두수(尹斗壽)의 건의로 전국적인 병제로 정해지게 되었다.
이어 뽕을 심어 누에칠 것을 권장하여 백성들로부터 이공상(李公桑)이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안주지방에서 비롯된 평안도 지역에서의 명성은 후에 임진왜란 발발 시 이원익이 평안도도순찰사로서 지역을 안정시키는 데 크게 도움이 되었다.
임진왜란 시기에는 이조판서로서 평안도도순찰사의 직무를 띠고 먼저 평안도로 향하였고, 평양이 함락되자 정주로 가서 군졸을 모집하고, 관찰사 겸 순찰사가 되어 평양성 인근에서 왜군에게 공격을 가하여 전공을 세웠다. 1595년에 우의정 겸 4도체찰사로 임명되어 영남체찰사영에서 지휘를 하였다. 구미의 금오, 창녕의 화왕, 함양의 황석산성 등 영남지역의 산성을 수축하는 데 힘을 기울이고 곽재우 등을 비롯한 의병장 및 어사 정경세 등 영남지역에서 신망 높은 인물들과 교류하며 영남 지역을 안정시키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특히 통제사 이순신과도 긴밀히 협조하여 한산도에 주둔하던 부대를 격려하여 사기를 올렸으며, 이순신이 파면당하자 적극 옹호하여 다시 천거되는데 기여하였다.
1599년에 영의정이 되었으나 당쟁에 휘말려 사직하고 도성을 떠나 소하리 선산으로 물러났다. 1601년 청백리에 천거되었는데 『조선왕조실록』은 “이원익은 성품이 충량(忠亮)하고 적심(赤心)으로 국가를 위해 봉공(奉公)하는 이외에는 털끝만큼도 사적인 것을 영위하지 않았다. 벼슬이 정승에 이르렀으나 의식(衣食)이 넉넉지 못하여 일생동안 청고(淸苦)하였는데, 이는 사람으로서 감당할 수 없는 것인데도 홀로 태연하였다.”고 전한다.
1604년에 임진왜란의 공으로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에 녹훈되고 완평부원군(完平府院君)에 봉해졌다. 당초에는 선무공신(宣武功臣)에도 올랐으나 사양하였다. 광해군 즉위 후에 다시 영의정이 되었는데, 그는 전쟁복구와 민생안정책으로 국민의 부담을 경감시키기 위하여 대동법(大同法)을 경기도 지방에 먼저 실시하여 토지 1결(結)당 16두(斗)의 쌀을 공세(貢稅)로 바치도록 하였다. 임해군(臨海君)이 처형되고 대비폐위론이 나오자 반대 상소문을 올려 결국 홍천(洪川)으로 유배되었으며 73세이던 1619년(광해군 11) 풀려나 여주에 머물렀다.
성품이 소박하고 단조로워 과장이나 과시할 줄을 모르고, 소임에 충실하고 정의감이 투철하였다. 다섯 차례나 영의정을 지냈으나 그의 집은 두어 칸짜리 오막살이 초가였으며, 퇴관 후에는 조석거리조차 없을 정도로 청빈하였다 한다. 1623년(인조 1) 9월에는 그가 77세 되는 것을 축하하기 위하여 인조가 궤장을 하사하고 잔치를 열어주었으며, 1631년에는 초가로 된 거처의 누추함을 보고 정당을 내려주니 극구 사양하다가 받았다. 이 집이 소하동 유적지에 전하는 관감당(觀感堂)으로 ‘모든 백성들이 보고 느껴야 할 집’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문화재 안내문안집1』
『경기문화재대관-도지정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