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인 신갈동 주구토광묘 유적은 오리~수원간 복선전철 추가 환기구#6 건설사업 부지에 대한 문화재조사에서 확인되었다. 현재 지하철 분당선 환기구가 설치되어 있다. 조사결과, 한성백제기의 주구토광묘 10기, 합구식옹관묘 3기, 통일신라 이후의 석실묘 및 석곽묘 7기, 조선시대 이후의 토광묘와 회곽묘 21기 등과 통일신라 이후로 추정되는 수혈 1기를 포함하여 모두 42기의 유구가 확인되었다.
주구토광묘는 한성백제기에 해당하며 구릉 정상부와 남사면에 주축방향을 등고선과 직교하게 조성하였다. ,주구와 토광묘(매장주체부)가 결합된 것 5기, 주구와 토광묘가 확인되는 것 4기, 주구 또는 토광묘만이 단독으로 것 1기로 나눌 수 있다. 유물은 심발형토기는 전혀 출토되지 않고 직구광견호(흑색마연토기), 직구단경호, 평저소호, 원저단경호 등 전형적인 백제토기가 출토되었다. 이외에도 한성백제 분묘에서 거의 출토되지 않는‘개배+뚜껑’의 셋트, 흑색마연기법이나 조족문 타날과 같은 특징적인 제작기법도 확인되고 있다. 토기를 중심으로 본 유적의 연대는 한성2기 4세기후엽~5세기전엽으로 설정될 수 있는데 인근의 마북동 취락유적과 마북동 백제토광묘와 동시기 유적으로 파악된다.
옹관묘는 3기가 조사되었는데 모두 합구횡치식의 장란형토기 옹관으로 한성백제기의 옹관묘의 양상과도 흡사하며 입지와 분포 및 장축방향은 주구토광묘와 동일한 양상이다. 3호 옹관묘는 4호 주구토광묘의 주구와 토광묘의 배장묘로 판단되며 인근의 마북동 백제토광묘유적과 상갈동유적에서도 확인된다. 2호 옹관묘와 8호 주구토광묘에서 중복관계가 확인되나, 시기 차이는 그리 크지 않다.
통일신라~고려초기의 석실묘와 석곽묘는 소수에 불과하나 유적 주변의 고분들과 그 궤를 같이한다. 주변유적은 대규모 신라고분군인 보정리 고분군이 위치하고 있고, 소실봉 주변에는 신라후기 분묘들이 밀집되어 있다.
석곽묘는 파괴가 심한 편이지만 일부 분묘에서 시상대나 철제관정이 확인되고 있고, 인화문이 시문된 토기뚜껑이나 어골문 평기와 등이 출토되고 있어 석실묘와 달리 어느 정도 시기 폭이 인정된다. 석실묘는 축조수법이나 구조적인 특징으로 보아 경기지역에서 통일신라기에 조성됐던 석실묘의 양상과도 부합되어 비록 출토유물이 빈약하나 중심연대는 같은 통일신라기로 볼 수 있으며, 석곽묘는 구조 특징과 출토유물 양상으로 보아 통일신라기에 축조되기 시작하여 고려 초기까지 지속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번 조사에서 역사시대 전시기에 걸친 묘제가 확인되는 것으로 보아 이 일대 구릉이 장기간에 걸쳐 당시 지역주민들의 묘역으로 사용된 것으로 판단되며 주변 생활유적과 분묘유적의 양상과 더불어 시기별로 변화하는 유적의 경관을 이해하는 데에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여 준다. 특히 조사지역과 그 외곽으로 바로 접한 지역에서 삼국시대의 유구들이 다수 조사됨에 따라 그간 규명하지 못하였던 한성백제를 비롯한 삼국시대 취락내의 공간구성과 취락간의 위계, 그리고 종합적인 경관을 복원할 수 있는 자료로서 향후에도 주목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참고문헌]
경기문화재연구원·한국철도시설공단, 2010, 『용인 신갈동 주구토광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