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주 와동리Ⅱ 유적은 파주시와 한국토지주택공사가 경기 서북부의 주택난 해소를 위해 파주시 교하읍 일원에 파주 운정(1) 택지개발사업을 추진함에 따라 지표조사를 통해 처음 알려지게 되었다. 2002년에 연세대학교 박물관에 의해 실시된 지표조사에서 유적·유물산포지는 89곳이 확인되어 2005~2006년 동안 경기문화재연구원에서 45개 지점에 대한 시굴조사를 실시하였다. 시굴조사 결과, 32개 지점에서 구석기시대, 청동기시대~조선시대에 해당하는 다수의 유구와 유물이 확인되었다. 이에 따라 32개 지점에 대하여 1~10차에 걸쳐 단계별로 발굴조사가 진행되었다.
와동리Ⅱ 유적은 7차 발굴조사로서 1지점과 2지점이 해당하며, 백제, 조선시대 유구와 유물이 확인되었다.
백제시대 유구는 2지점 B구역의 남사면 말단부에서 토기가마 2기, 원형 수혈 1기가 조사되었다. 이는 모두 한성백제시기 경기 북부지역의 토기생산의 중요한 학술적 의미를 지닌 자료라 할 수 있다.
토기가마는 모두 장타원형의 평면형태를 가지며, 연소실과 소성실이 수평으로 연결되지 않고, 소성실보다 연소실을 깊게 굴착한 수직연도식으로 조성되었는데 사면삭박이 심하고 후대교란으로 가마의 잔존상태가 양호하지 못하여 다른 구조를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경기지역에서 조사된 동시기 토기가마의 기본적인 성격과 유사하고 고고지자기 연대측정 결과 5세기 초반에 조성된 것으로 밝혀짐에 따라 한성백제 토기가마 및 토기 편년 연구에 활용될 것으로 기대된다. 유물은 대옹의 구연부, 동체편 및 호형토기의 구연부, 동체편 등이 출토되었다.
가마와 인접하여 조성된 원형 수혈의 내부에서 난방을 위한 15cm의 석영제할석을 봇돌로 사용한 아궁이와 할석 및 점토를 혼합하여 약 15~20cm 높이로 구들을 조성하고 구들장으로 사용된 판석 1기, 수혈의 벽면을 굴착하여 만든 배연시설이 확인되었다.
조선시대의 유구는 주거지 30기, 수혈 271기, 탄요 2기, 초석건물지 5기, 구들유구 7기, 회곽묘 2기, 토광묘 1기, 담장유구 1기, 구상유구 1기 등 총 368기가 조사되었다. 이 중 학술적 의미를 지닌 자료로는 조선시대 온돌시설(반구들)이 시설된 주거지 5기가 주목된다.
주거지는 평면형태가 방형 또는 장방형이며, 취사 및 난방시설, 주혈, 벽구 등의 내부시설이 확인되었으나 내부시설 중 취사 및 난방시설이 조성되지 않은 주거지가 더 많다. 온돌시설 및 벽구시설이 갖추어진 5기의 주거지는 상시주거용 볼 수 있지만 대부분 장기간 사용이 아닌 임시주거용으로 판단된다. 난방시설이 확인되지 않은 2지접 B구역 6호 주거지의 경우 48점의 다양한 유물이 출토되어 보관용 시설일 가능성 생각할 여지가 있다.
수혈은 규모가 소형이고 원형이 다수이다. 일부 수혈의 내부에서 피열흔 및 소토, 봇돌을 시설하기 위한 굴착흔 등이 확인되는 것으로 볼 때, 야외에서 사용한 노지일 가능성이 있다.
2지점 A구역에서 확인된 사성(莎城)과 사성을 곡장 삼아 남사면 곡간부를 중심으로 확인된 개장묘군은, 지석 및 석물에 남은 명문을 토대로 보성임씨 가문의 가문묘역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또한 석물의 재질이나 수법, 출토 유물, 명문 내용 등을 고려하였을 때, 개장묘군은 18~19세기 무렵에 조성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조사 전 이장으로 인하여, 원형이 심하게 훼손되어 학술적인 자료가 거의 남아있지 않으나, 토루와 유사한 사성을 길이 120m, 폭 10~12m의 규모로 눈썹형으로 돌려 곡장으로 삼은 점은 특기할 만하다. 이런 묘역의 조성이 19세기를 중심으로 하는 시기에 국한하여 유행한 것인가에 대한 향후 검토가 필요하다.
[참고문헌]
경기문화재연구원·한국토지공사, 2010, 『파주 와동리Ⅱ유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