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산 수청동 백제분묘군은 한국토지주택공사에서 시행한 오산 세교지구 택지개발사업에 수반된 문화유적 시·발굴조사를 통해서 확인되었으며, 4지점과 5지점에 해당한다.
백제분묘군은 북서-남동 방향의 주능선에서 동쪽으로 뻗은 해발 60m 가량의 3개의 가지구릉과 각 가지구릉의 연결부에 걸쳐서 넓게 분포하고 있다. 발굴조사 결과 삼국시대의 주구가 둘려진 목관묘 141기, 이중목관묘 4기, 목곽묘 2기와 함께 주구가 없는 목관묘 95기, 목곽묘 2기, 옹관묘 1기 등 삼국시대 분묘 303기가 확인되었다. 이밖에 동시기의 수혈 34기와 함께 삼국시대~근대에 걸친 유구도 확인되었다.
자연녹지 및 유적보존을 위한 보존지역 설정으로 인하여 수청동 분묘군 전체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분묘의 배치상황 등을 통해 삼국시대 분묘군의 전체범위를 확인할 수 있었다. 조사된 내용을 바탕으로 추정되는 삼국시대 분묘군의 전체 범위는 서쪽으로는 주 구릉의 정상부와 능선을 경계로 동사면과 4·5지점의 동-서 방향의 가지구릉이 모두 포함되는 119,270㎡ 가량으로 판단된다.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은 지역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과 항구적인 보호대책이 마련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4지점 25호 목관묘는 다른 분묘와는 달리 매장부의 충전토 바닥에서 철모, 호미형철기, 성시구 등의 목관 설치시의 부장 유물이 확인되었다. 부장부에서는 대형 원저단경호, 직구단경호 등과 함께 중국제 청자반구호가 확인되었다. 조사담당자는 4세기 초엽으로 편년되는 청자가 5세기 말엽으로 편년되는 유물들과 함께 부장된 것에 대해 傳世品일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5-1지점 53호 목관묘는 수청동 분묘군에서 유일하게 탄화된 목재가 확인되었는데, 충전토의 내측면과 바닥에서는 확인되지 않고 충전토의 위에서 확인되었다. 이러한 출토양상을 통해, 수청동에서 사용한 목관을 바닥이 없는 비이동식, 현지 조립식 관으로 추정하는 데에 근거를 제공하고 있다.
5-1지점 67호 주구부목관묘는 매장부에서 200여점의 소찰 또는 편의 상태로 찰갑이 출토되었는데, 동체부를 보호하는 신갑 외에 上膊甲札로 추정되는 소찰도 확인되었다. 신라·가야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자료가 빈약한 백제의 찰갑의 연구에 있어 도움이 되는 자료라고 할 수 있다.
5-2지점 21호 주구부목곽묘, 18호·20호 주구부이중목관묘는 전체 크기가 1,000㎝ 내외의 대형 분묘이며, 내부에서 철정과 철제꺾쇠가 출토되어 내관의 존재를 추정할 수 있다. 내관 내부에는 환두도를 부장하였으며, 목개 상부 혹은 부장부에서는 재갈이 출토되었다. 대형화된 묘와 마구 및 환두도, 백제토기 등의 부장유물로 보아 시기 및 위상을 파악할 수 있다.
이번 조사에서 확인된 백제시대 분묘는 303기이다. 동일 분묘군에 속하면서 2004년에 조사가 이루어진 7기를 합하면 현재까지 310기가 확인된 셈이다. 그리고 보존녹지에 매장되어 있을 분묘수를 고려한다면 실로 경기지역 최대의 백제시대 분묘유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면 이 수청동분묘군과 연계되는 정치적 실체는 무엇인가 하는 의문이 절로 제기된다. 이와 관련하여 유적지 주변 일대에 매홀초등학교와 매홀중학교가 자리하고 있는 사실을 간과할 수 없다. 이에 買忽이 수원의 고지명인 점, ‘매’의 의미가 물과 직결되고 유적지가 자리한 곳이 수청동임 점, 그리고 유적지가 오산천의 지류이자 현재 오산과 수원의 분수령에 위치한 점, 제 2지점에서 청동기시대의 대규모 취락유적이 확인된 점 등등을 무시할 수 없다. 따라서 수원지역을 마한 54개국 중 2번째로 기술된 牟水國으로 보는 견해는 수정이 필요하다고 판단된다. 오히려 8번째 伯濟國과 14번째 目支國(月支國)사이의 일국이 수원지역에 해당될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그 중심거점은 본 유적을 중심으로 오산 수청동지역이 아닌가 추측해 본다. 앞으로 이에 대한 적극적인 검토가 요망된다.
[참고문헌]
기전문화재연구원·우미건설, 2006, 『烏山 水淸洞遺蹟』경기문화재연구원·한국토지주택공사, 2012, 『烏山 水淸洞 百濟墳墓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