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 융릉과 건릉(華城 隆陵과 健陵)은 사적 제206호로 소재지는 경기도 화성시 효행로481번길 21(안녕동 187-1번지)이다.
융릉(隆陵)은 사도세자와 그의 부인 혜경궁 홍씨의 무덤이다. 정조가 왕위에 오르면서 장헌세자라 하였고, 1899년에 의황제로 봉해졌다. 이때 혜경궁 홍씨도 의황후로 봉해졌다.
융릉은 원래 양주의 배봉산에 있던 영우원을 수원의 화산으로 옮겨 현륭원이라 하였다. 합장릉인 융릉은 병풍석을 세우고 모란과 연꽃무늬를 새겼다. 석등은 전기의 8각형과 숙종, 영조대에 등장한 4각형 석등의 양식을 합한 새로운 양식으로 건릉과 예릉의 기준이 되고 있다. 무덤의 석인도 사실적이고 예전에 가슴까지 숙여진 머리가 들려 있어 시원한 분위기를 내며, 문인석에서는 머리에 금관을 쓴 예가 나타나고 있어 19세기 이후의 무덤 양식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정조는 현륭원을 마련할 때 온갖 정성을 기울여 창의적으로 만들었다.
건릉(健陵)은 조선 22대 정조와 그의 부인인 효의왕후 김씨의 무덤이다. 정조는 효성이 지극하였으며 많은 인재를 등용하고, 조선 후기의 황금문화를 이룩하였다.
건릉은 현융원의 동쪽 언덕에 있었으나 효의왕후가 죽자 풍수지리상 좋지 않다는 이유로 서쪽으로 옮기기로 하고 효의왕후와 합장하였다. 무덤은 한 언덕에 2개의 방을 갖추었으며 난간만 두르고 있고, 그 외의 모든 것은 융릉의 예를 따랐다. 혼이 앉는 자리인 혼유석이 하나만 있으며, 융릉과 같이 8각형과 4각형을 조화시켜 석등을 세웠다. 문무석은 사실적이며 안정감이 있는 빼어난 조각으로 19세기 무덤의 석물제도의 새로운 표본을 제시하였다.
화성 융릉과 건릉을 포함한 조선왕릉(왕릉 40기, 원 13기 등 총 53기)은 2009년 6월 26일 제33차 세계유산위원회에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 융릉·건릉→화성 융릉과 건릉 명칭변경(2011.07.28. 문화재청 고시)
(자료출처 :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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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내용 출처 : 문화재청
능, 원, 묘의 구분
왕족의 무덤은 왕실의 위계에 따라 능, 원, 묘로 분류된다.
1. 능(陵) : 추존왕, 추존왕비를 포함한 왕과 왕비의 무덤
2. 원(園) : 왕세자와 왕세자비, 그리고 왕의 사친(私親 : 종실로서 임금의 자리에 오른 임금의 생가 어버이)의 무덤
3. 묘(墓) : 나머지 왕족, 즉 왕의 정궁의 아들, 딸인 대군과 공주, 왕의 서자, 서녀인 군과 옹주, 왕의 첩인 후궁, 귀인 등의 무덤
※ 아래내용 출처 : 경기문화포털
융릉·용주사 관련 설화에는 어떤 것들이 있나?
1789년(정조 13) 정조는 배봉산 아래의 사도세자 묘를 현륭원(顯隆園; 뒤에 융릉)으로 바꾸고 수원의 옛 읍치인 화산으로 옮겼다. 합장묘인 융릉의 봉분 아랫부분은 목단과 연꽃 문양이 양각된 12면의 병풍석이 감싸고 있어 조선후기 예술의 극치를 보여 주고 있으며, 상석 1좌, 망주석 1쌍, 석양(石羊)·석 호(石虎) 각 1쌍, 문인석 1쌍, 팔각 장명등 1좌, 무인 석·석마(石馬) 각 1쌍을 배치하여 정조의 효심을 정성껏 표현하였다.
이어 정조는 1790년 갈양사 터 인근에 능사(陵寺)로서 용주사를 세우고 부친의 명복을 빌었다. 사도세자 기일을 전후한 정조의 능행은 지역민들에게 여러 가지 기록과 일화를 남겼다. 융릉과 용주사와 관련한 설화를 소개하여 친근하고 효성이 가득한 18세기 옛 이야기를 들어보자.
① 정조대왕이 융릉을 조성하고 열심히 소나무를 가꾸어 번창하게 되었는데, 언젠가 송충이가 아주 많이 생겨 소나무들이 죽어 가게 되었다. 송충이는 독털 때문에 다른 새들도 잡아먹지 않아 날로 극성하니 정조가 큰 걱정을 하였다. 불개미만이 송충이를 잡아먹는다 하여 전국에 방을 내려 불개미를 잡아다 능에다 두어도 송충이가 잡히지 않았다. 걱정이 된 정조대왕이 송충이를 입으로 깨물어 죽이니 그런 뒤로부터 송충이가 서서히 줄고 드디어는 소나무가 아주 번창하게 되었다. 이는 새도 잘 먹지 않는 송충이를 효성으로 다스렸기 때문으로 전해진다.
② 비 오고 날 흐린 날 능참봉이 능에 배를 깔고 누워 참배를 하고 있었다. 정조가 이를 보게 되어 “너 왜 이렇게 하고 있느냐?”하고 물었다. 능참봉이 “번개치고 그래서 묘에 계신 임금님이 겁이 나실까 봐 내가 보호해 드리느라고 그런다.”고 대답했다. 정조가 “너는 참으로 정성이 지극하고 충실한 사람이다.”라 하고 상을 내리고 벼슬도 높여 주었다.
③ 융릉을 이장한 후 전국의 사람들 중 수원땅에 살고 싶은 사람을 모아 융릉과 용주사 인근 등에 살게 했다. 어떤 사람이 능참봉이 되어 아주 좋아했는데, 정조가 한 달에 스물아홉 번이나 거둥을 했다. 그래서 “모처럼 능참봉을 하니까 임금님 거둥이 한 달에 스물아홉 번이 다.”라는 속담이 생겼다. 무슨 일이 자주 일어나 성가시다고 할 때 쓰는 말이다.
④ 용주사에는 아주 깊고 물의 양도 풍부한 우물이 있었다. 용주사 절 뒤편으로 중간쯤 올 라가면 아주 좋은 묏자리가 있는데 사람들이 여기에 몰래 야장(夜葬)을 하면 용주사의 물이 안 나왔다. 그래서 용주사 우물에 물이 안 나올 때 이 곳을 파보면 영락없이 누가 야장을 해 놓은 것을 찾아낼 수 있었다.
⑤ 융릉 앞의 조그만 개울에 네 개의 돌로 놓아진 큰 돌다리가 있는 데, 이것을 사형제 다리라 한다. 예전에 네 형제가 각각 하나씩의 돌을 져다가 만들었다고 전한다. 지금은 백 사람이 있어도 이 큰 돌을 날라다가 만들기 어렵다.
융릉에 얽인 전설
조선 정조 때 전해 오는 이야기이다. 지극한 효심을 지녔던 정조는 수시로 아버지 사도세자가 묻힌 능으로 행차를 하였다. 그런데 어느 날 정조는 미복차림으로 아무도 모르게 사도세자의 묘소로 암행을 하게 되었다. 그 때 마침 밭에서 일을 하던 농부를 만나게 되었는데, 정조는 사도 세자의 능에 대해 그 농부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고 싶었다. 농부에게 능을 가리키며 저곳이 어떤 곳인가를 물은즉, 농부는 저곳은 뒤주대왕의 애기릉이라고 대답하였다. 정치적 희생양으로 뒤주 속에서 억울하게 죽임을 당하지만 않았어도 왕이 되었을 사도세자의 능이라 뒤주대왕이라 했고, 애기릉이라 한 건 임금님들의 산소를 능이라 하지만 왕이 못되셨으니 그렇게 부른 것이라고 하였다.
정조는 내심 크게 기뻐하였다. 대신들의 반대로 사도세자의 명예를 회복하지 못하던 차, 한 농부의 입에서 뒤주대왕 애기릉이라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정조는 그 농부가 너무나 고마웠다. 그래서 농부에게 글을 얼마나 읽었는지 물어보았다. 그 농부는 책도 많이 읽고 과거도 여러 번 본 실력을 갖춘 선비였으나 불운하게도 번번이 낙방하였다는 것이다. 다시 한 번 과거를 보라는 정조의 말에, 아무리 실력이 있어도 또 떨어질 것이 뻔하다하면서 그 농부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정조는 그 농부의 마음을 겨우 돌려 다시 과거를 보게 하였다. 그리고 환궁한 뒤 특별 과거시험을 치르라는 명령을 내렸다. 과거시험을 보러간 농부가 시제를 받아보니 융릉 근처에서 있었던 자신과 어느 선비의 대화와 관련된 내용이었다. 그가 합격하였음은 당연한 일이었다. 과거에 급제하고 난 뒤 왕을 배알하던 중 그는 자신과 대화를 나눈 선비가 바로 임금이었 다는 사실을 알고 깜짝 놀랐으며, 성은에 감복하였다고 한다.
『문화재대관-사적편(개정판,上)』
『경기문화재대관-국가지정편』
『(경기도 역사와 문화) 백문백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