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 제암리 3.1운동 순국 유적(華城 堤岩里 3·1運動 殉國 遺蹟)은 사적 제299호로 소재지는 경기도 화성시 향남읍 제암길 50(제암리 322-4번지)이다.
1919년 4월 15일, 일제가 3·1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화성군 향남면 제암리 교회에 주민들을 감금시키고 학살한 곳이다. 3·1운동이 진행되던 때 수원군은 전국에서 가장 활발하고 치열한 만세 운동이 벌어진 곳이다. 더욱이 3월 28일 수원군 송산면 사강리 시위와 4월 3일 우정면 화수리 시위 때에는, 시위대원들이 발포하고 도주하는 일본 순사를 처단한 바 있다. 이에 일제는 수원군 일대 주민들을 학살하고 민가를 방화하는 등 대대적인 보복 조치를 취했는데 그 일환으로 4월 15일, 시위에 적극적이었던 제암리에 출동하여 주민들을 교회에 모이게 한 후 석유를 뿌려 불을 지르고 교회당에 총을 난사하여 주민들을 집단 학살하였다.
1982년 9월, 이 학살 사건의 유일한 생존자인 전동례의 고증으로 이 지역을 발굴 조사하고, 23위의 유해를 수습하였다. 그리고 9월 29일 합동 장례식을 거행한 후 교회 뒷동산 양지바른 곳에 안장하고, 불탄 교회 자리에 순국 기념탑을 세웠다. 같은 곳에 있는 순국기념관에는 학살 사건과 관련된 국내외 자료 및 기록화가 전시되어 있다.
※ 제암리3·1운동순국유적→화성 제암리 3·1운동 순국 유적 명칭변경(2011.07.28. 문화재청 고시)
(자료출처: 『경기문화재총람-국가지정편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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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내용 출처 : 경기문화포털
3·1운동 당시 제암리에서 벌어졌던 일제의 만행은?
1919년 3월 이후 전국적인 만세운동은 화성땅도 예외가 아니었다. 아니, 화성의 만세운동은 어느 지역보다도 격렬하고 치열하였다. 현재 송산면 사강시장 인근과 우정읍·장안면 일대에는 일본순사의 처단이 라는 강력한 수단이 동원되었다. 특히 3월 28일 송산면 사강에서 만세 운동이 일어나 총기를 난사한 노구찌 순사를 처단한 사건과 3월 31일 발안장 시위를 발단으로 4월 3일 장안면과 우정면의 연합 만세시위가 벌어져 화수리 주재소의 가와바타[川端豊太郞] 순사가 총기를 난사하며 살상을 하자 민중들이 그를 쫓아가 처단하였다. 4월 5일에는 발안장에서 다시 만세운동이 전개되어 주재소를 둘러싸고 투석전을 벌였다. 즉 제암리 학살은 단순한 사건이 아니라 전반적이고 치열하게 전개되는 독립운동의 연장선에서 일본 제국주의 만행을 드러낸 민간인 학살 사건이었다. 제암리 주변의 격렬해지는 독립운동의 기세를 의도적으로 무자비한 탄압으로 저지하여 국면 전환을 모색하고자 벌어진 것이다.
제암리 학살사건은 당시 제암교회에서 일어났다. 제암교회는 경기도 화성시 향남읍 제암리(일명 두렁바위골)에 위치하고 있다. 현재 제암교회는 2001년 기념관 건립에 따라 함께 설립된 것이다. 제암교회의 시작은 안종후가 자기집 사랑방에서 1905년 8월 5일 예배를 시작한 이래 1911년 초가 예배당을 마련하였다. 당시 안종후는 마을 지도자로서 많은 사람들에게 포교할 수 있었다. 그래서 안종후는 홍원식·김정헌· 안진순 등과 교회활동뿐만 아니라 야학을 운영하면서 한글교육과 애국정신을 고취시키는 데 앞장섰다.
1972년경에 안종후의 아들인 안동순이 중심이 되어 제작한 영화 『두렁바위』에는 안숙자가 제암리에서 야학을 운영하는 장면이 재연되고 있어 이 지역은 일찍이 기독교의 영향으로 신교육을 실시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영화에서는 만세운동을 감시하러 온 친일순사 두 명을 제암리 방앗간에서 처단하는 장면이 묘사되고 있어 진위 여부가 의문으로 남는다. 그러나 입과 입으로만 전해지는 이야기는 기록 여부를 떠나 후손들의 자긍심을 보여주는 사건이 아닐 수 없다.
1919년 4월 15일에 있었던 제암리 학살사건은 발안주재소 일경들과 수원에 주둔하고 있던 제78연대 소속 아리 따 도시오 중위가 이끄는 헌병 1개 소대 30여 명이 주도하였다. 발안주재소 사사까[佐板] 소장과 친일인물 조희창(趙熙彰)은 마을 어귀에 들어오면서 “지난 4월 5일 발안 장터에서 너무 심하게 매질한 것을 사과하고자 왔으니 15세 이상의 남자 신자들은 모두 예배당에 모이라.”고 했다. 예배가 없던 화요일인 점을 감안하면 처음부터 의도적으로 계획한 일이다. 자의반 타의반으로 아무 영문도 모른 채 선열들은 예배당에 모였다. 사사까 는 강단 앞에 서서 호명을 하며 선열들을 일일이 확인까지 한 것으로 보아 이미 치밀한 계획 아래 학살을 준비한 것이 분명하다.
일터에 나가 알지 못해 참석하지 못한 선열들은 일경을 보내어 불러들이기까지 했다. 잠시 후에 일경과 헌병들은 예배당 문마다 나무를 대고 못질을 하여 폐쇄시키고 석유를 뿌린 후 불을 질렀다. 헌병들은 예배당을 포위하고 총을 쏘기 시작하였다. 그 후 일경과 헌병은 예배당 옆집부터 불을 질렀다. 33호의 조용한 초가 마을에 외딴집 한 채만 남겨 놓고 모조리 불태웠다. 이때 예배당 안에서 남자 21명, 예배당 뜰에서 부인 2명이 불에 타는 냄새와 각 가정에서 곡식과 가축과 의류가 타는 냄새는 멀리 떨어진 오산에서도 그 다음날까지 느낄 수 있었다고 한다.
일경과 헌병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제암리 옆 동네인 고주리로 달려가 천도교인 6명을 결박하고 산으로 끌고 가 총을 쏘아 죽인 후 나무 더미를 그 위에 놓고 불을 질렀다. 당시 이 지역에서는 기독교인과 천도교인이 연합하여 독립운동을 하였기에 그들 6명도 희생 대상이었다. 이런 사실은 제암리가 단순한 기독교인만의 희생이 아니라 범종교적인 독립운동의 근원지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제암리와 고주리의 학살사건 이후 6명의 천도교인은 유족과 주민에 의하여 장례를 치렀는데 제암리에서 희생당한 23명의 유해는 장례도 치르지 못하고 인근의 공동묘지에 안치되었다.
제암리 학살사건은 제암리 마을만의 희생에 머무르지 않는다. 이 지역의 독립에 대한 열망과 자유에 대한 의지를 만 천하에 선언한 역사의 현장이기 때문이다. 나라가 어려울 때 자기 한 몸에 연연하지 않고 자유와 독립에 자신을 희생 한 제암리 선열들의 순수한 희생정신을 오늘의 공동체정신으로 계승해야 할 때이다. 제암리 선열들의 민족정신과 이타주의(利他主義) 정신은 90년이 흐른 지금도 두렁바위 마을의 곳곳에 살아 숨쉬며 우리를 채찍질하고 있다.
3·1운동 순국기념관은 매주 월요일과 설·추석 명절을 제외하고는 연중 개관하여 일본군의 만행과 순국선열의 넋을 기리는 역사의 교육 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제암리 순국기념관을 답사할 때마다 ‘더 이상 어둠과 침묵의 공간이 아닌 자유와 희망이 있는 역사의 현장으로 역발상하면 어떨까’하는 생각이 든다.
『경기문화재대관-국가지정편』
『화성시 문화재 편람』
『(경기도 역사와 문화) 백문백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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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 제암리 3·1운동 순국 유적.pdf (149.8 K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