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주사동종(龍珠寺 銅鍾)은 국보 제120호로 소재지는 경기도 화성시 용주로 136(송산동 188번지) 용주사 이다.
화성시 태안읍 구릉 송림에 위치한 대한불교 조계종 제2교구 본사 용주사에 고려의 명종 1구가 전한다. 이 절의 옛 이름은 갈양사이다. 갈양사는 854년(신라 문성왕 16)에 염거가 창건하였으나 952년(고려 광종 3) 화재로 폐사되었다. 970년 혜거국사가 갈양사터를 돌아보고, “물이 맑고 산이 아름다워 만대에 복된 터가 될 것”이라고 왕실에 절의 중건을 요청하고 이듬해인 971년(광종 22) 갈양사를 중건한 뒤, 승방 혜거헌을 차리고 머물렀다. 혜거는 974년에 76세로 이곳에서 입적하였고, 994년(성종 13)에 최량이 비문을 지어 혜거국사비를 세웠다. 이후 갈양사는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수륙재를 여는 등 수륙도량으로 이름났다. 그러나 그로부터 조선 중기까지는 언제 다시 폐사되었는지 연혁이 전하지 않는다. 1790년(조선 정조 14) 조정에서 이 절터를 정조의 부친 장헌세자의 무덤인 현륭원에 딸린 원찰로 삼기로 하였다. 이에 보경 사일이 철학 등과 함께 8만 냥의 시주를 거두어 현대의 용주사를 세웠다. ‘용주(龍珠)’란 사찰의 낙성식 전에 용이 여의주를 물고 승천하는 길상을 현몽한 정조가 붙인 이름이다.
국보 제102호로 지정된 용주사 범종은 양식적으로 고려 전기를 대표할 만한 조형미를 보여준다. 높이 145㎝, 지름 86-6㎝, 종구 두께 6.6㎝로 현전하는 고려 전기 범종 가운데 두 번째로 큰 대종이다. 전체적으로 청동고색을 띠고 있는 이 종은 용뉴가 작게 조형되었지만 종신비례의 균형감이 풍부하고 섬세한 문양 장식이 돋보이는 고려 전기의 대표작이다.
용주사 범종의 용뉴는 단룡과 음통으로 종고리를 형성하는 전형적인 신라 종의 양식을 계승하고 있다. 그러나 종신에 비하여 작게 조형되었기 때문에 안정된 비례감은 느낄 수 없다. 용은 크게 벌린 입에 여의주를 물로 눈을 치켜뜬 채 전방을 주시하는 보습니다. 긴 눈썹이 휘날리는 듯 표현되었고, 콧등에서 돋아난 단각은 S자 형태로 길게 조형되어 강인한 긴장감을 자아낸다. 아가리 주위로 돋아난 염익은 상부가 잘려 나갔으며, 발꿈치에서 돋아난 염익은 심하게 뒤틀린 모습으로 조형되었다. 몸통의 동세는 ∩형으로 신라종의 전형을 따랐으며, 등에는 거치형의 기기가 돋아났다. 좌측 발은 앞을 향해 위로 쳐든 모습이며, 우측 발은 뒤로 벌려 날카로운 발톱을 천판에 딛고 있다. 좌측 발가락은 원래 4개였으나 3개가 절단 망실되었고, 우측 발톱은 완전한 상태이다.
크기가 일정치 않은 6단의 마디로 구성된 음통은 연주문으로 각 마디를 구획하였다. 가장 윗부분의 절에는 연판문이 장식되었고, 그 밑에는 만개한 화문이 평면형으로 새겨졌다. 폭이 좁은 3절과 4절에는 국화형의 작은 화문이 장식되었고, 5절에는 다시 2단 화문의 부분이 잘려서 배치된 모습이다. 맨 아래 마디에는 만개한 꽃과 줄기와 이파리가 어우러진 보상화문이 미려하게 장식되었다.
용주사 범종의 천판은 주조상태가 비교적 양호하지만 용뉴를 중심으로 튀어 오른 2단형의 조형 상태를 보여준다. 먼저 용뉴를 별도로 주조하고, 종신의 거푸집 위에 조립 설치한 다음 최종적으로 주조하는 합주방식으로 제작하였을 경우 이러한 현상이 발생된다. 용의 입에 문 여의주가 천판에 물린 듯 주조되었으며, 음통 하부 역시 동일한 상태를 보이는 것도 바로 합주법의 결과에서 비롯된 현상이다.
용주사 범종은 매우 안정된 균형미를 보여준다. 비교적 넓게 구획된 상태는 섬세한 연주문대를 상하로 돌려 구획하였다. 그 내부에는 반원권 문양을 배치하였으며 사이에는 당초문이 촘촘히 장식되었다. 반원권은 연주문대를 돌려 3중으로 구획하였고, 그 내부에는 하트형의 보상화가 돌려졌다. 이러한 반원 문양은 국보 제36호 상원상 동종과 일본 우사진구 소장 송산촌대사명종에서 그 시원적 유형을 찾아볼 수 있으나 한국 종에서 널리 유행된 패턴은 아니다.
하대는 상하로 큰 연주대와 작은 연주대를 2중으로 장식하여 구획하였는데 이러한 장식수법은 한국 종에서는 유일한 사례이다. 내부에는 만개한 평면형 화문을 감싸듯이 휘감아 돌아 가는 덩굴무늬가 빼곡하게 장식되었다. 꽃 모양은 8~9개의 꽃잎이 원형으로 펼쳐졌고, 중심에는 삼보점과 꽃술이 자방을 형성하고 있다. 연곽대는 상대에 접하여 종신상부 사방에 조형되었다. 윤곽은 섬세한 연주대를 장식하여 구획하였고, 내부에는 꽃이 생략되고 S자형 줄기와 이파리로 구성된 덩굴무늬가 유연한 선각으로 새겨졌다. 연곽의 내부에는 9개씩 모두 36개의 연뢰형 돌기가 장식되었다. 직경 45㎝의 원권형 연좌는 꽃술이 방사형으로 펼쳐진 듯한 모습이며 연뢰는 꽃잎으로 감싼 형태이나, 다른 문양에 비하여 주조상태가 미흡함을 나타낸다. 연뢰는 하나의 연곽만이 아홉 개 모두 보존 상태가 완전하며, 다른 곳은 절손되거나 망실되어 12개의 연뢰가 잘려 나갔거나 주조의 결함 상태를 보여준다.
유곽과 유곽 사이의 종신 상부에는 2구의 비천상과 2구의 삼존상이 교대로 배치하였다. 삼존상은 각각 천의를 휘날리며 구름 위를 비행하는 모습이다. 가운데의 여래상은 연화대좌에 결가부좌한 모습으로 조형되었고, 좌우 천인은 합장한 모습으로 묘사되었다. 이러한 삼존상은 아미타정토에서 망자를 맞이하려는 아미타성중의 내영 상황을 도상으로 표현한 것이다.
비천상은 천의를 휘날리며 구름 위를 날고 있는 단독상으로 표현되었다. 손에는 아무런 지물을 들지 않았으나 강조된 가슴의 영락이 이채롭고, 심하게 꺾인 허리의 동세가 다소 어색함을 감출 수 없다.
용주사 범종의 당좌는 전후좌우에 각각 1개씩 전체 4구가 장식되었다. 직경 290㎝의 당좌는 연주대를 돌려 이중으로 구획하였고, 외구에는 나선문을 심구에는 연화문이 장식되었다.
용주사 범종은 주성할 당시 명문이 없는 무명종이었다. 그러나 현재 용주사 범종에는 두 곳에 음각으로 새겨진 명문이 존재하며 명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성거산 갈양사 범종 1구를 반야스님이 2만5천 근으로 주성하다. 금상 16년 9월 일 사문 염거’, ‘성황산의 후신 화산 갈양사의 후신 용주사 신라 문성왕 16년 3월 일에 창건과 동시 이 범종을 주성하다. 불기 2천9백5십년 7월 주지 석□거 대연 기록’. 이상의 명문은 이 종이 갈양사의 초창 당시인 854년(신라 문성왕 16)에 주성되었음을 밝히는 내용이다. 그러나 명문상의 1950년은 구불기로서 1923년에 해당된다. 따라서 이 기록은 1923년에 당시 주지 대연에 의하여 임의로 추정한 주성연대를 새긴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종은 몸체의 조형성이 성거산 청흥사 동종과 흡사하며, 고려시대의 전형적인 양식인 삼존상이 새겨졌고, 두 배로 늘어난 당좌와 문양 장식 및 용뉴의 여의주 장식 등을 고려하여 양식적으로 고려 초기의 작품으로 추정할 수 있다.
(자료출처: 『문화재대관-국보 금속공예』)
『(국보·보물) 문화유산을 찾아서-경기도, 인천광역시』
『화성시 문화재 편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