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주 가월리와 주월리 유적(坡州 佳月里와 舟月里 遺蹟)은 사적 제389호로 소재지는 경기도 파주시 적성면 달빛길 345이다.
파주 가월리 및 주월리 구석기 유적의 전체 면적은 약 14,000평에 달한다. 이 유적은 1988년 3월 임진강 일대에서 지표조사를 실시하던 서울대학교 조사단에 의해 발견되었다. 발견 당시 이곳 지표에서는 주먹도끼를 비롯해 찍개·긁개·몸돌·홈날·사용된 석재 등의 크고 작은 다양한 유물이 수백 점 수습되었다. 수습 유물은 그 질과 양에 있어 1979년 사적 제268호로 지정된 연천군 전곡리 유적보다도 뛰어난 양상일 뿐만 아니라 상당한 면적의 퇴적층이 경지정리로 훼손되지 않은 채 양호한 상태로 남아 있어 보호조치가 시급히 필요한 형편이었다. 그 결과 유적은 1993년 3월 25일 사적으로 가지정되었으며, 1993년 7월 23일에서 8월 31일 사적 지정 자료 확보를 위한 시굴조사를 거쳐 1994년 12월 21일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이 유적이 사적으로 지정된 가장 중요한 이유는 이곳에서 발견된 주먹도끼 때문이다. 이곳에서는 발견된 20여 점의 주먹도끼는 길이 15~25㎝, 폭과 두께 각각 8~10㎝ 및 5~8㎝ 내외로 크고 작은 것이 섞여 있다. 그 형태는 커다란 규암 자갈을 양방향으로 가공해 평면과 단면 형태의 대칭성이 매우 높은 것과 더불어 원석의 형태를 최대한 이용해 단지 몇 차례의 타격만을 가한 것이 있으며, 선단을 뾰족하게 만들지 않고 짧고 비스듬하게 가로로 날을 만든 것도 발견되었다. 이 유적에서 발견된 주먹도끼의 수량은 우리나라에서 하나의 유적에서 발견된 것으로는 가장 많을 뿐만 아니라 형태적으로도 매우 다양해 동아시아 구석기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이 유적은 파주군 적성면에서 연천군 백학면으로 이어지는 371번 지방도의 서쪽에 놓여 있다. 연천군 남계리 부근에서 합수한 임진강과 한탄강은 적성면 일대에서 중성산, 국사봉 등 감악산 줄기에서 뻗어 내린 산지지형의 영향으로 하천의 흐름이 크게 두 차례 사행하는데, 유적 일대 지역은 남동에서 북서방향으로 흐르던 임진강이 적성면에 이르러 급작스럽게 북에서 남쪽으로 크게 방향을 트는 정점의 남쪽에 해당한다.
두 지점중 가월리 지점은 4차선으로 신설확장된 37번 국도의 주월교차로와 가월교차로 사이 구간에서 북쪽 100m 정도 떨어진 곳에 있으며, 주월리 지점은 가월리 지점에서 서북서 방향으로 약 1㎞ 떨어져 있다. 발견 당시 주월리 지점 일대는 자연지형이 인위적으로 훼손되지 않은 채 조그마한 구릉 형태로 남아 있어 경지정리 이전 이 지역 일대의 원래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다. 가월리 지점도 원 지형과 퇴적층은 주월리 지점보다는 떨어지지만 비교적 양호한 상태로 보존되어 있었으나 사적 지정 이후 1993년 일부 시굴지역은 토지 소유주의 무단 형질변경으로 최상층이 훼손되었다.
가월리 지점에서 정남방향으로 약 1.5㎞ 떨어진 야산에는 2002년 사적 제437호로 지정된 파주 칠중성 유적이 있다. 또 사적에서 북쪽으로 임진강변에는 삼국시대 초기 유적인 육계토성과 주월리 주거지 유적이 있으며, 임진강 건너 서쪽으로는 사적 제467호 호로고루 성지와 사적 제244호 경순왕릉이 있는 등 이 일대에는 구석기시대 이래 각종 선사 및 역사시대 유적이 산재해 있다.
이 유적의 형성 시기나 그 과정은 한탄강과 임진강을 따라 형성된 용암대지 위에 만들어진 전곡리를 비롯한 여러 유적과 기본적으로 동일하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전곡리를 비롯한 상류지역과는 달리, 적성 일대에서 용암대지는 임진강 본류에 근접한 곳에서 제한적으로 분포하고 있다. 하천에 근접한 주월리에서 용암대지의 발달이 해발 22m에서 확인되는 반면 가월리에서는 동일 고도에서 대규모 하천운동을 보여주는 두터운 퇴적층이 관찰된다. 이는 용암류가 하류로 흘러가며 용암의 양이 현격하게 줄어들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용암류가 거의 전 유역을 덮고 있는 전곡지역과 대조를 이루고 있다.
유적의 층위는 기본적으로 현무암 – 자갈 – 모래 – 실트 – 점토의 다섯 요소로 이루어져 있다. 이러한 층위 구성은 전곡리·남계리·금파리를 비롯해, 임진강 일대에서 조사된 유적과 기본적으로 성격을 같이 하는 것이다. 그러나 현무암과 그 위에서 발견되는 자갈 – 모래 -실트 층은 용암대지 형성 이후에 임진강의 퇴적운동으로 쌓인 것이라 보이지만 사적지역 주변 여러 곳의 단면에 노출된 두터운 자갈층이 용암대지와 어떠한 시간적 관계를 갖고 있는지는 아직 분명하지 않다.
유물이 퇴적층 최상부를 구성하는 수 미터 두께의 실트-점토성분 고토양층에서 수습되고 있음은 상기한 여러 지점에서 보는 바와 마찬가지 양상이다. 이러한 유물 포함층은 다양한 색상 변화를 보여주며, 다른 유적에서 보는 바와 마찬가지로 여러 형태의 2차적 토양구조를 보여주고 있다. 유적의 연대, 특히 유적이 형성되기 시작한 시점에 대해서는 아직 결론을 내릴 수 없다.
1993년도 시굴보고서는 유적의 연대에 대해 전반적인 퇴적 상황과 전곡리 부근에서의 TL 연대측정 결과 및 유물중 구석기시대의 상대적으로 늦은 시기에 발견되는 유물이 포함되어 있다는 점에서 4~5만 년 전을 전후한 시기일 가능성이 클 것이라 추정하였다. 그런데 사적 지정 이후 가월리 지점 및 전곡리 유적에 노출된 단면 최상부 지표 바로 아래에서는 대략 25,000~30,000년 전 사이에 일본 큐슈 남단에서 분출한 Aira-Tanzawa화산재(약칭 AT)가 발견되어 유물과 유적의 절대적인 하한 연대를 말해주고 있다.
또 이후 가월리 시굴갱 A의 실트 층 상부와 퇴적단면 최상부 가까이에서 얻은 시료에 대해 실시한 OSL 연대측정결과 각각 190,000±24,000 및 235,000±16,000 B.P.의 연대가 얻어졌고 주월리 시굴갱 A의 실트층 상부에서는116,000±7,300 B.P.가 얻어졌다. 그렇지만 앞의 두 연대는 층서적(層序的)으로 역전된 것이라 신빙성이 떨어지며 뒤의 연대는 단지 하나의 측정치에 불과하기 때문에 이를 토대로 그 연대를 결정지을 수는 없다고 보인다.
한편 사적지역 가까이 37번 국도의 우회구간이 새로 개설되며 해당 구간에 대한 시굴과 발굴조사가 각각 2002년 9~12월 및 2003년 3~6월에 걸쳐 한양대 및 서울대 합동조사단에 의해 실시되었다. 조사는 사적지역의 주월리 지점에서 동쪽으로 200m 정도 떨어진 곳에서부터 다시 동쪽으로 약 1.4㎞에 걸친 구간을 대상으로 이루어졌다. 이 조사에서는 토양시료를 갖고 IRSL 연대측정을 실시했는데 유물포함층 하부에서 78,000±24,000, 상부에서 51,000±23,000 및 47,000±11,000 B.P.의측정치가 얻어졌다.
이러한 새로운 자료에도 불구하고 유적의 연대를 확정하기 위해서는 보다 많은 분석이 필요해 유적의 정확한 연대구명은 장차 중요한 연구과제로 남아 있다. 그런데 최근 임진강유역의 용암대지는 종래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늦게 형성되었을 가능성이 드러나고 있어 이 유적뿐만 아니라 전곡리 유적의 연대에 대해서도 새로운 해석이 필요하게 되었다. 1993년도 시굴에서는 표토층 채집 품을 포함해 주월리 지점에서 106점, 가월리 지점에서 48점의 유물이 수습되었다.
유물은 모두 규암과 석영 원석만을 이용해 만들어졌는데 지표채집 품에서 두 종류의 원석이 차지하는 비율은 거의 비슷하지만 시굴수습 유물 총 154점 중에서는 석영제가 130점을 차지해 압도적이다. 주월리에서는 퇴적층 최상부에서 한 점의 ‘등손잡이 칼’이 발견되었다. 이 석기는 정연한 날의 잔손질 수법이나 새기개 날을 붙여 만든 점을 비롯해 주먹도끼와 시기를 달리하는 석기일 가능성이 있으며 홈날석기를 비롯한 소형 박편을 이용한 유물이 여러 점 수습된다는 점과 더불어 유적 상층에는 후기구석기시대 유물이 포함되어 있다는 인상을 갖게 해준다.
한편 주먹도끼는 시굴에서 수습되지 않았지만 지표에서 약2.5m 아래에 있는 문화층 최하부에서는 대형 몸돌 한 점이 수습되었다. 이 석기는 그 전반적인 형태나 가공 특징에서 주먹도끼 종류 석기와 동반하는 유물이라고 판단된다. 따라서 유적을 구성하는 퇴적층의 두께와 더불어 유물군의 특징도 이 유적이 상당한 시기에 걸쳐 형성되었음을 시사해주고 있다.
2002~2003년에 이루어진 조사에서는 주먹도끼·찍개·대형 긁개·홈날석기·석핵·박편으로 만든 소형 석기를 비롯해 모두 800여 점의 유물이 수습되었다. 또 유물 중에는 한 덩어리에서 떨어져 나온 접합석기도 발견되어 고대인이 이곳에서 직접 석기를 만들었음을 추정케 해준다.
(자료출처 : 『문화재대관 사적 제1권(증보판)』
『경기문화재대관-국가지정편』
『파주자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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