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주 칠중성(坡州 七重城)은 사적 제437호로 소재지는 경기도 파주시 적성면 구읍리 산148번지 외 이다.
칠중성은 파주의 중성산(해발 147m) 정상부와 서봉(西峰 : 해발 142m)의 8~9능선을 따라 축성된 테뫼식산성이다. 전체 둘레는 603m이고, 남북 폭은 198m, 동서 폭은 168m이다. 두 봉우리를 연결하여 마안형(馬鞍形)을 이루고 있는 삼국시대의 산성이다. 중성산은 감악산(紺嶽山 : 해발 675m)의 서북쪽 줄기에 위치한 낮은 산이다. 그러나 주월리·가월리를 포함한 임진강 일대까지 높은 산이 없기 때문에 주변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위치에 자리 잡고 있다. 현재 이 지역은 문산~적성~전곡으로 이어지는 37번 국도와 개성~장단~적성~의정부~서울로 연결되는 349번 지방 국도가 교차되는 교통의 요지이기도 하다.
칠중성은 임진강 중류의 남쪽 강안에 위치하여 황해도지역과 한강유역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로서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먼저 칠중성은 임진강 도하를 저지할 수 있다. 임진강유역은 갈수기에 특별한 도하장비 없이 건널 수 있다. 임진강은 곳곳이 곡류(曲流)를 이루는 사행하천(蛇檧河川)으로 여러 곳에 물여울이 있다. 물여울은 좁고 유속이 빠르기도 하지만 건기에는 자주 바닥이 드러나므로 쉽게 강을 건널 수 있다. 이러한 지역의 남쪽과 북쪽 강안에 산성을 쌓아 이를 방어했던 것이다. 칠중성 주변의 호로하 또는, 칠중하 지역, 특히 가여울(술탄戌灘)은 삼국시대뿐만 아니라 한국전쟁 당시에도 중공군이 도섭(徒涉)한 지역이다. 칠중성은 북방세력의 남진을 방어하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다. 북방 세력이 임진강을 도하, 남진할 수 있는 통로는 파주 통로와 더불어 적성 통로가 있다. 칠중성은 적성 통로를 방어하는 위치로 인해 임진강을 경계로 하는 세력 간에 가장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였다.
칠중성이 위치한 지역에 대한 명칭은 시대마다 달랐다. 백제시대에는 ‘난은별(難隱別 : 높은 볕)’이라 했고, 고구려가 점거하면서 ‘칠중성현’으로 불렀다. 신라는 처음에는 계속 칠중성현으로 부르다가 경덕왕(?~765) 때에 ‘중성(重城)’으로 개칭했다. 고려시대에는 ‘적성(積城)’으로 고쳐 불러 현재에 이르게 됐다. 성의 명칭도 여러 명칭으로 전래되어 토탄고성(吐呑古城)·성산·칠중성·낭비성(娘臂城) 등으로 불렀다. 칠중성이 등장하기 이전에는 칠중하(七重河)라는 명칭이 먼저 등장하고 있다.
칠중하의 최초 기록은 기원전 1년 백제 온조왕(?~28)과 말갈과의 전투를 시작으로 하고 있다. 그 후 선덕여왕(?~647)때에 신라와 고구려 사이의 전투(638), 태종무열왕(604~661) 때의 고구려와 신라 사이의 전투(660), 문무왕(626~681) 때의 신라와 당나라 사이의 전투(675)가 이 지역에서 벌어졌다. 특히 신라와 당나라가 칠중하에서 치른 전투는 나당전쟁의 분기점을 이루는 전투였다. 당은 거란족·말갈족과 합세해 칠중성을 포위, 공격했으나 실패했다.
이 전투는 신라 측으로는 희생이 컸지만 칠중성의 수성작전에는 성공, 당나라 군의 임진강이남 진출을 저지할 수 있었다. 당은 칠중성 패전의 책임을 물어 총사령관 유인궤(橝仁軌)를 본국으로 소환하고 부사령관 이근행(橷謹檧)으로 대행케 했다. 이 전투의 패전을 만회하기 위해 당군이 주력을 동원해 대규모 공세작전을 벌인 전투가 바로 매소성전투였다. 매소성전투에서 대패한 당나라 군은 곧바로 재기를 위한 최후의 결전인 제2차 칠중성전투를 전개하였다. 이 전투 에서도 신라 군은 성주 김유동(金儒冬)이 전사하는 희생 가운데 끝내 수성하는 데 성공했다.
칠중성전투는 나당전쟁의 최대 전환점이 된 매소성전투의 전초전으로 시작, 이 전투의 대미를 장식하는 최종전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 지역은 고려시대에는 거란과 몽고의 침입 경로로 이용됐다. 1217년 몽고의 동방원정에 밀려 고려에 침입한 거란족의 유종(遺種)이 방비가 강화된 개경 침입 대신 장단을 거쳐 육계토성과 적성을 경유해 철원을 점령했다.
한국전쟁 당시에도 치열한 전투가 이 지역에서 전개됐다. 중공군 3만여 명이 인해전술로 임진강을 도섭, 남진할 때 영국군 1개 대대가 3일 동안 중성산에서 방어전을 벌였다. 이 지연책 덕분에 중공군의 서울 진입을 지연시키는 데 성공했다. 칠중성은 백제 초기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군사적 요충지로 삼국시대에 이 지역의 영유권을 두고 치열한 쟁탈전을 벌인 거점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중요한 지리적 특징과 역사성을 가지고 있으나 휴전선과 가까운 임진강 연안에 위치하였기 때문에 군사시설물이 조성되어 성내 전 지역이 훼손되었으며, 제대로 된 조사도 이루어지기 어려웠다.
칠중성은 1994년 육군박물관에 의해 지표조사가 행해졌다. 2001년 단국대매장문화재연구소의 정밀지표조사를 통해 전체적인 윤곽과 저장구덩이 등이 조사되었고, 많은 유물을 수습하였다. 성내에는 많은 군사시설물이 조성되어 산성의 원형은 많이 훼손되었으나 추정 문터 3개소·추정 건물터 5개소·우물지 2개소 등이 조사되었다. 그리고 전체 석성으로 내벽과 보축, 외성벽이 여러 차례 중복되어 있음이 확인되었다. 특히 동벽·남벽에서는 내벽과 보축이 확인되었으며, 칠중성 전체 성벽외부에는 토루 및 석축단이 여러 군데에서 조사되었다. 마치 외항을 이루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이것이 외항인지 아니면 또 다른 성벽인지 최근에 조성된 군사시설 때문에 생겨난 것인지 알 수 없다. 그 성격은 발굴조사를 실시해야 명확해 질 것으로 추정된다.
지표조사 결과 수습된 유물은 기와류와 토기류가 주종을 이루고 있으며, 일부 소량의 철제유물도 있다. 시기는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 이르기까지 연대 폭이 넓다. 유물의 대다수는 기와편이고 토기는 소량이 수습되었다. 수습된 토기도 대부분 파편으로 기형을 짐작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기와류 중에는 ‘칠(七)’자가 새겨진 명문기와가 주목된다. 사격자문에 마름모 형태의 액을 마련하였는데, 명문이 비교적 선명하게 남아 있다. 다른 명문은 없어서 이것이 칠중성을 뜻하는 것인지 명확하지 않지만 산성의 명칭과 관련해서 일단 주목할 수 있다. 그리고 승문이 깊게 시문되어 있는 고구려 기와 파편이 수습되었는데, 기와 파편은 호로고루성에서 수습된 고구려 기와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태토는 잘 정선되어 석립이 거의 없다. 비록 작은 편이지만 배면에는 모골흔(模骨痕)이 정확하게 나타나고 있다.
이 밖에 대부분의 유물은 신라계가 압도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다. 기와는 대체로 반월산성, 설봉산성, 이성산성 등 한강유역 산성에서 출토되는 것들과 유사하다. 대체로 중심 연대는 7세기경으로 볼 수 있다. 토기도 대부분 신라계 토기가 수습되었다. 기형으로는 고배와 병·시루호·인화문 뚜껑·발형토기 등 다양하다. 기와의 양상과 함께 신라가 칠중성을 가장 활발하게 이용하였던 사실을 대변하여 주고 있다. 그런데 토기 중에는 백제토기로 추정되는 것이 있는데, 비교적 안정된 층위에서 수습되어 백제시대 칠중성의 축조 문제와 관련하여 주목된다. 이상과 같이 칠중성에서 수습된 유물은 백제계와 고구려계가 소수 있지만 절대다수를 신라계유물이 차지하고 있고, 성벽 역시 신라적인 특징을 반영하고 있다. 따라서 백제 토기편이나 고구려 기와편에 대한 해석은 조심스럽게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칠중성은 처음 신라가 축조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백제 초기부터 칠중하가 격전지로 등장하고 있고 임진강이 고구려와 백제의 접경지대였던 것으로 미루어 보아 백제가 처음 축성했을 가능성은 배제하기 어렵다. 그 동안 조사를 통해서 백제가 축조하였을 가능성은 꾸준히 제시되고 있다. 이번 조사에서도 백제토기로 볼 수 있는 유물이 소수 발견되고 있다. 그러나 토기의 편년과 제작국을 추정하는 문제는 전체적인 기형을 고려해야 하고 아울러 유물과 상대되는 유구의 출토도 필요하다. 때문에 소수의 백제계 토기편을 백제의 축성 사실과 바로 연결시키기는 위험하다. 그러나 칠중성 인근 주월리 유적(육계토성)에 대한 조사 결과, 백제시대 주거지를 비롯하여 다수의 백제 유물이 출토된 바 있다. 칠중성은 육계토성의 배후가 되고 있으므로, 한성 백제시대(B.C.18~475) 칠중성이 이 지역의 거점성으로 기능했을 가능성은 계속 추구되어야 할 것이다.
칠중성에서 수습된 유물 대다수는 역시 신라이고, 성벽조사에서도 신라의 특징이 가장 많이 나타나므로 삼국 중 신라가 가장 오랫동안 사용하였고, 축조 및 수개축도 신라에 의하여 가장 활발하게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문헌기록을 검토할 경우 신라가 칠중성을 차지하였던 상한선은 6세기 후반이나 7세기 초 고구려와 한강유역을 놓고 치열한 접전을 펼치게 되면서 양국의 격전지가 되었다. 고구려의 줄기찬 공격 속에서도 칠중성은 7세기 대부분 기간 동안 신라의 소유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삼국사기』기록으로 보아 660년부터 668년까지 일시적이나마 고구려가 칠중성을 차지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강수(强首 : ?~692)의 「답설인귀서(答薛仁貴書)」에 의하면 칠중성은 고구려의 성으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번 조사에서도 고구려계 기와가 수습되어 그러한 가능성을 뒤받침하고 있다. 그런데 칠중성이 고구려의 영역이 되었다면 상당히 복잡한 상황이 생겨나게 된다. 이 경우 고구려군은 양주지역까지 진출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현재 임진강 일대와 양주지역에서 고구려 보루성이 다수 발견되었다는 보고가 있다. 현재 이 보루성을 대체로 6세기 중반 이전에 축조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칠중성이 고구려의 수중에 있었다고 한다면 7세기 후반에 고구려군의 일부가 양주 일대까지 진출하였을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
칠중성은 돌을 이용해 산봉우리를 중심으로 쌓은 산성으로 길이는 600m 정도이지만, 현재 대부분의 성벽은 무너져 내려 외형적 형태가 제대로 남아 있는 부분이 거의 없고 성벽이 훼손된 곳도 많다. 그러므로 정확한 성의 구조를 이해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그러나 성벽의 일부 구간에서는 여러 번에 걸쳐 개축된 보축 성벽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이와 같이 변형된 칠중성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위해서는 본격적인 발굴조사가 이루어질 필요가 있다. 이를 통해 기본 성벽의 구조와 축조 방식 및 건물터 등에 대한 보다 자세한 현황을 파악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자료출처 : 『문화재대관 사적 제2권(증보판)』)
『고구려 유적의 보고 경기도』
『경기도의 성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