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혼선생묘(成渾先生墓)는 경기도기념물 제59호로 소재지는 경기도 파주시 파주읍 성현로 60-20이다.
조선 중기 성리학의 대가인 우계(牛溪) 성혼(1535∼1598) 선생의 묘소이다. 성혼은 명종 6년(1551) 생원·진사의 초시(初試)에는 모두 합격하였으나 복시(復試)에 응하지 않고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휴암 백인걸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우고 같은 고을에 사는 이이와 사귀게 되면서 평생의 친구가 되었다. 하지만 학문 성향에서는 이황을 지지하여 이이와 선조 5년(1572)부터 6년간에 걸쳐 사단칠정(四端七情)에 대한 논쟁을 벌여 유학계의 큰 화제가 되었다.
그의 덕행이 뛰어나 선조대 초부터 여러 번 관직이 주어졌으나 학문에만 전념하다가 이이의 권유로 이조참판에 올랐다. 임진왜란 때에는 우참판에 이르고 선조 27년(1594)에는 좌참판에 이르렀다. 그러나 당시 영의정 유성룡(柳成龍, 1542~1607)과 함께 일본과의 화의를 주장하다가 선조의 노여움을 사게 되어 고향인 파주로 돌아갔다. 그가 죽은 뒤 선조 35년(1602)에 기축옥사(己丑獄事)와 관련하여 관직이 박탈되었다가 인조 11년(1633)에 복관사제되어 좌의정의 벼슬이 내려졌다.
봉분 우측에는 묘비가 있고, 정면에는 상석과 향로석이 배치되어 있다. 상석 전방에는 좌우로 문인석이 갖추어져 있다. 묘비는 팔작지붕형 가첨석(加檐石), 비신(碑身), 기대(基臺)로 구성되어 있고, 비문은 김집(金集, 1574~1656)이 글을 짓고 윤순거(尹舜擧, 1596~1668)가 글씨를 써서 조선 인조 27년(1649)에 건립한 것이다. 비문에 관직을 쓰지 않은 것은, 그의 유명(遺命)에 따른 것이라고 밝혀 놓았다. 신도비는 묘역 입구에 있는데 비문은 김상헌(金尙憲, 1570~1652)이 글을 짓고, 김집이 글을 썼으며, 김상용(金尙容, 1561~1637)이 전액(篆額)을 썼다.
(자료출처 : 문화재청 / 『경기문화재총람-도지정편2』)
『경기문화재대관-도지정편』
『문화재 안내문안집. 1』
『파주자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