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우현성당사제관(下牛峴聖堂司祭館)은 경기도기념물 제176호로 소재지는 경기도 의왕시 원터아랫길 81-6이다.
청계산과 광교 산맥을 잇는 골짜기에 자리잡고 있는 하우현(下牛峴)성당은 서울에서 약 24㎞ 떨어져 있고 안양시와는 20리 거리로 근접해 있다. 이 곳은 옛날 동양원이라는 역원(驛院)이 있던 곳으로 현재 원터라고도 불리운다. 성당의 사제관은 1900년에 지어진 건물로 서양식 평면과 구조 방식에 우리의 전통적인 지붕재료와 처마구성을 가미하여 전체적으로 한국적인 모습으로 보이도록 꾸며진 한양절충식 근대 종교 건축물이다.
하우현 성당은 100년이 넘는 유서 깊은 역사를 가진 성당이다. 1884년에 공소 공동체를 갖추었고 1893년에는 공소로 설정되었다. 1893년 공소 초대 회장으로 김윤중(베드로)이 선출된 기록이 있다. 1894년 5월 왕림본당 2대 신부인 알릭스(Alix) 신부는 하우현 신자들이 공소 강당없이 교우 집에서 공소 예절을 행하는 것을 보고 강당 신축을 강력히 권고하였다. 그 결과 알릭스 신부가 협조한 금액과 하우현 교우들이 모금한 1,500냥으로 초가지붕의 목조 강당 10칸을 건축하였다. 1900년에는 신자가 160명에 달했으며, 샤플랭 신부가 부임하면서 정식으로 하우현 본당이 되면서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한강이남 경기지역에서는 세 번째로 본당이 된 것이다. 일제강점기 이후 공소와 본당을 거듭하던 하우현 성당은 광복 이후 1965년 김영근 신부 재임 시절에 성당 건물이 퇴락하여 붕괴 위험이 있음을 보고 미군부대 건축자재 원조로 현재의 성당을 신축하였다.
하우현성당에서는 1903년경부터 학교를 설립하여 운영하였다. 1920년 윤예원 신부가 하우현으로 오면서 경애강습소가 설립되었다. 윤예원 신부는 부임하기 전 황해도 은율본당에 있을 때 신자들에게 독립의식을 심어주고, 대한민국임시정부에 군자금을 지원하기도 했다고 한다. 경애강습소는 4년제 초등교육기관으로 선교와 봉사, 애국심 함양 등을 교육의 중점으로 하면서 주민들의 문맹퇴치운동과 신개화사상을 교육하였다. 이 강습소는 윤예원 신부가 전임한 이후 운영상의 어려움을 겪다가 1930년 경 폐쇄되었다. 이후 하우현은 본당 설정 이래 본당 폐쇄가 거듭 되풀이 되고 타 본당에 귀속된 공소였던터라 사목 활동이 활발하지 못했었다.
하우현성당 오른편에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사제관이 자리하고 있다. 1906년에 건축된 사제관은 처음에는 벽체를 거의 벽돌로 쌓고 서양식 지붕틀에 함석지붕을 올리고, 외부에 초석을 갖춘 기둥을 세워 회랑을 마련하였다고 한다. 이후 개보수를 거치면서 돌로 만든 벽체에 팔작 기와지붕을 올렸다.
몸체에는 기둥을 사용하지 않고 모두 자연석으로 벽체를 쌓았으므로 외부에서는 칸을 구별할 수 없다. 벽체는 면을 다듬은 자연석을 허튼층으로 쌓고 백회줄눈을 넣었다. 사면을 둘러 툇기둥을 세워 서까래를 받아 처마를 구성하였는데, 측면 서까래 뒷뿌리는 측벽에 묻어 지지하였다. 대지경사를 이용해 기단을 쌓아 전면은 2m 내외로 높으나 우면은 뒷마당과 외벌대 정도의 차이 밖에 나지 않는다. 사면 퇴에는 원뿔대형의 높은 초석 위에 각기둥을 세웠는데, 측면 및 전면 좌우 칸에는 후대에 각 칸 중간마다 보조기둥을 세워 보강하였다. 내부는 좌우 장변으로 3분하고 전후 단변으로 2분하였다. 전면 중앙에 전실, 향좌측에 식당과 뒷방을 두고, 향우측에는 전후로 통칸의 방을 구성하였으며, 전후로 길게 띠장을 걸쳐 고미천장을 꾸몄다. 내부 마감과 창호는 초창 때의 모습에서 변형되었는데, 특히 전실 출입구는 원래의 것보다 폭이 줄었으며, 출입문 앞쪽에 마련했던 툇마루도 제거되었다.
사제관은 몸체의 평면짜임과 벽식구조, 창호 및 난방방식, 지붕틀 등 주요 구조체가 서양식으로 되어있는데, 이는 당시 프랑스에서 온 신부들이 사용하기 편리하도록 설계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툇기둥과 처마 구성에서는 전통가구식 구조를 사용하고 지붕재료도 전통 골기와를 써서 외관을 전통팔작지붕처럼 꾸몄다. 초기의 외래종교건축에서 나타나는 한양절충식 건물이 주로 한국의 전통적인 건축구조에 서양식의 종교적 요소를 가미하던 것과 비교하면 하우현성당 사제관은 서양식 평면과 구조를 위주로 하면서 한국적인 요소를 일부 채용하여 전통건축의 모습을 갖추도록 만든 건물로서 근대 초기 외래종교건축이 시기적으로 변해가는 흐름을 보여주는 특징을 갖고 있다. 또한 성당 건물이 아니라 사제관에 한양절충식이 채택된 것은 드문 경우로서 평면 및 구조, 의장 등에서 건축사적 가치가 높은 건물이다.
(자료출처 : 문화재청 / 경기문화포털 / 『경기문화재총람-도지정편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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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내용 출처 : 경기문화포털
청계산 깊은 산중에 어떻게 하우현성당이 세워졌을까?
천주교는 17세기에 중국을 방문한 우리나라 사신들에 의해 서학으로 소개되었다. 처음에는 서양학문의 한 부분으로 연구하였지만 18세기 후반 정조 때에 일부 실학자들이 신앙으로 천주교를 믿기 시작했다. 정조는 천주교에 대하여 비교적 관대하였으나 점차 서민층과 여성들에게도 교세가 확장되면서 순조 때에 이르러 천주교를 금지하고 대탄압이 가해지기 시작하였다.
하우현에 언제부터 천주교인들이 살았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다. 하우현은 주변에 높은 산이 있고 수풀이 우거져 있어 박해를 피해 살던 천주교인들에게는 숨어살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곳이었다. 이때 천주교인들이 땅을 파고 굴속에서 살았다고 해서 ‘토굴이’라는 지명이 생겨나기도 하였다.
기록상으로는 충청도 홍주에서 광주 의일리(현 의왕시 학의동)로 이주해 살던 한덕운이란 천주교인이 1801년 신유박해 때 순교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시기에 하우현 고개 넘어 묘론리와 둔토리(현 성남시 분당구 운중동) 지역에 천주교 신자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1845년에는 하우현에 살던 김준원이란 신도가 광주 포교에게 체포되어 남한산성에서 순교한 사실이 있다. 1865년에는 프랑스의 루도비꼬 볼리외 신부(1840~1866, 한국이름 서몰례)가 이곳으로 와서 동굴 속에 숨어 지내면서 사람들에게 우리말을 배우고 천주교 교리를 가르치다가 그 이듬해 병인박해 때 순교하였다. 이러한 사실로 보아 19세기 초 이래 하우현과 그 주변에 신자들이 거주하였으며, 중엽에 이르러서는 하우현 일대가 천주교 신앙의 중심지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의왕시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