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영대군이구묘역및사당(臨瀛大君李璆墓域및祠堂)은 경기도문화재자료 제98호로 소재지는 경기도 의왕시 능안아랫발길 32, 147-17이다.
임영대군 이구(李璆, 1418~1469)는 세종의 넷째 아들로 소헌왕후(昭憲王后) 심씨 소생이다. 1428년(세종 10) 대군에 봉해졌는데 어려서부터 학문을 닦는데 시·서·경·사와 병서에 뛰어났으며 화포와 화차 등 병기 개발에 남다른 재능을 보여 부왕의 총애를 받았다. 그는 생존한 왕자들에게 치국진언할 것을 종용하고 동기간 우애 회복에 노력하였다. 1469년(예종 1)에 별세하였는데 그가 남긴 유훈(遺訓)에 따라 예장(禮葬)도 하지 않았고 신도비도 세우지 않는 등 검소하게 장례를 지냈다고 한다.
능안마을의 배산인 모락산 중턱에 임영대군묘가 있고 그 동쪽에 배위인 제안부부인(濟安府夫人) 최씨묘가 있으며 이곳에서 동쪽으로 약간 떨어진 나지막한 언덕 위에 사당 일곽이 자리잡고 있다.
묘역은 3단으로 상단에는 봉분과 비석이 있는데 봉분은 둘레가 1,650㎝, 높이가 210㎝로 대형이다. 봉분주변의 호석은 1981년에 새로 축조한 것으로 동서남북의 모서리에 대나무, 꽃, 새 등의 무늬를 새겨놓았다. 봉분의 동쪽에는 높이 200㎝, 너비 50㎝의 비석이 있는데 앞면에 「조선국왕자임영대군정간공지묘(朝鮮國王子臨瀛大君貞簡公之墓)」 뒷면에는 「개국오백삼십삼년알봉곤돈병월일중건신좌(開國五百三十三年閼逢困敦病月日重建辛坐)」가 새겨져 있다. 중단에는 상석, 망주석 2개, 장명 등이 있다. 원래의 상석은 없어지고 1981년 새로 만든 이 상석은 140×90×45㎝의 크기이고, 비석은 너비 43㎝, 높이 36㎝로 중간에 문고리 모양이 양각되어 있다. 숙종때 세웠다고 하는 장명등은 사방으로 4개의 구멍이 뚫려 있다. 하단에는 동서 양쪽에 높이 250㎝의 문신석인이 있는데, 얼굴이 새겨진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두 손을 모아쥐고 있는 홀도 선명하다.
임영대군의 신주를 모신 사당은 묘역에서 동쪽으로 약 200m 떨어진 곳이다. 원래 사당의 위치는 마을에 있었으나, 지금부터 약 180년 전에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고 한다. 제향은 음력으로 정월 21일 낮 12시에 행하며 전국에서 많은 후손들이 참여한다고 한다. 사당은 크지는 않지만 건물의 짜임새나 전체적인 균형이 잘 맞추어져 있다.
이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남도리집인데 전면에는 개방된 퇴칸이 있고 그 안쪽은 벽체로 각 칸을 막아 3실로 구분하였다. 어칸에는 주독(主櫝)을 설치하여 임영대군과 제안부부인 최씨의 신주를 모셨으며 그 앞에 제탁과 향탁을 갖추었다. 좌우 협칸에는 제기와 제복을 보관하고 있다. 기단은 전면과 측면에 장대석을 일렬로 놓아 마감하였고 초석은 방향으로 잘 다듬은 것인데 춤이 비교적 높은 편이다. 기둥은 전면만 원주이고 나머지는 모두 방주인데 흘림이 거의 없다. 어칸과 협칸 창호는 모두 군판(裙板)이 있는 띠살 4분합인데 어칸 창호가 협칸의 것보다 약간 높이가 높다. 측면과 후면의 벽체는 모두 심벽이며 중방 아래에는 화방벽(火防壁)을 시설하였다. 가구(架構)는 1고주 5량 형식인데 물매가 비교적 완만하다. 전퇴 고주와 후면 평주 사이에 대들보를 걸쳤는데 위로 휘어진 만곡재(彎曲材)를 써서 중대공없이 종량 위에 판대공을 세워 종도리를 받쳤다. 처마는 흩처마이고 지붕은 맞배 형식인데 측면에는 방풍판으로 막았고 용마루 위에는 회를 발라 만든 양성(兩城)을 두어 이 건물의 품격을 높이고자 하였다. 현재의 사당은 19세기 후반에 중건된 것이나 묘(墓)와 함께 건립한 신당(神堂)이 많이 남아있지 않으므로 건축사적 중요성을 가진다고 할 수 있다.
(자료출처 : 문화재청 / 『경기문화재총람-도지정편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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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내용 출처 : 문화재철 / 경기문화포털
능, 원, 묘의 구분
왕족의 무덤은 왕실의 위계에 따라 능, 원, 묘로 분류된다.
1. 능(陵) : 추존왕, 추존왕비를 포함한 왕과 왕비의 무덤
2. 원(園) : 왕세자와 왕세자비, 그리고 왕의 사친(私親 : 종실로서 임금의 자리에 오른 임금의 생가 어버이)의 무덤
3. 묘(墓) : 나머지 왕족, 즉 왕의 정궁의 아들, 딸인 대군과 공주, 왕의 서자, 서녀인 군과 옹주, 왕의 첩인 후궁, 귀인 등의 무덤
세종 아들인 임영대군의 묘가 의왕에 있는 까닭은?
이성계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무인세력과 정도전 등 신진사대부 세력은 조선이라는 새로운 나라를 세우고, 수도를 개경(지금의 개성)에서 한양(지금의 서울)으로 옮겼다. 유교를 국가 통치의 근본원리로 삼고, 왕권을 확립한 뒤 세종 때에 이르러 정치·경제·사회가 안정되고 문 화가 융성해졌다. 이와 관련하여 의왕시에는 세종의 넷째 아들 임영대군(臨瀛大君)과 관련된 역사와 문화유적이 있다.
임영대군 이구(李璆, 1418~1469)는 세종대왕의 넷째 아들이자 수양 대군(세조)의 동생이다. 그는 성격이 매우 활달하고, 문학과 역사를 두루 섭렵해서 논리가 뛰어나고 무예도 훌륭했다고 한다. 세조는 임영대군이 어질고 학식이 높은 선비와 같다고 칭찬하였다. 『예종실록』에 따르면, 임영대군은 항상 검소하고 재산에 욕심을 부리지 않았으며, 사람을 대할 때 정성을 다하고 거짓과 꾸밈이 없었다고 한다. 이러한 성품을 따서 예종은 임영대군에게 정간(貞簡)이란 시호를 내려주었다.
임영대군은 세종과 문종대에 무기를 연구하여 총통을 새롭게 고쳐 만들고 화차를 제작했다. 형 수양대군이 단종을 물러나게 하고 왕위에 오르자 그의 통치를 보좌하였다. 왕자들 사이에 골육상쟁을 경험한 그는 동기간의 우애회복에 노력하여 여러 조카들 가운데 인재들을 찾아내어 관리로 등용하기도 하였다. 세조가 화포제작을 주관한 경험을 살려 군기감을 조사토록 하자 그 잘못을 확인하고 군기감 운영을 바로잡도록 하였다. 또한 세조의 명을 받아 신숙주와 함께 효령대군을 위한 원각사 창건에 힘쓰기도 하였다.
임영대군은 비록 궁중에서 자라고 생활하였지만 민간의 생활을 잘 알고 백성들의 어려움을 헤아려 정책에 반영하려 했다. 예를 들면, 군사들에게 개인적으로 갑옷을 만들어 입게 하자는 논의가 있었는데, 당시 그 제도가 시행되면서 백성들이 소를 잡아서 갑옷 비용으로 다 써버리게 되어 백성들의 원망이 많았다. 이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던 임영대군은 먹고 입는 것도 힘든 군사들에게 갑옷까지 만들어 입도록 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라고 세조에게 건의했다. 이처럼 임영대군은 세조를 잘 섬기면서 백성들의 이로움과 해로움을 조정에 전하는 등 백성들을 보살피고 사랑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고 한다.
임영대군은 예종이 즉위한 직후 5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임금은 그의 죽음을 매우 슬퍼하며 5일 동안 조정에서 하는 회의를 폐지하고 장례의 필요한 물품을 충분히 제공해 주었다. 후손들에게 전해져 내려오는 얘기에 따르면, 수양대군이 조카 단종을 몰아내고 임금이 되자 임영대군은 이곳 의왕시 능안마을에 내려와 숨어 지냈다고 한다. 세조가 함께 조정을 돌보자고 찾아왔지만 이를 끝내 거절하였으며, 매일 모락산 큰 바위에 올라가 망궐례를 올리면서 한성을 걱정 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로 말미암아 모락산(慕洛山)이란 이름이 생겨났다고 한다. 그리고 임영대군의 묘역을 중심으로 후손들이 모여 살면서 능안(陵內)마을이라 부르게 되었다.
임영대군의 묘역은 의왕시 내손동 능안마을 모락산 자락에 위치하고 있다. 묘역의 가장 큰 특징은 묘역을 상계·중계·하계 3단으로 구분하여 조선 전기 왕실 묘역의 형태를 갖추고 있는 점이다. 상계에는 상석과 묘표가 배치되어 있으며, 중계에는 장명등과 망주석을, 하계에는 문인석을 차례로 배치하였다. 장명등과 문인석은 조선시대에 세워진 것이며, 묘표는 1924년에 다시 중건되었고, 망주석은 1981년에 묘역을 정비할 때 새로 교체되었다. 광해군과 인조, 현종 때에는 임영대군의 묘역이 왕릉 후보지로 선정되기도 했다.
임영대군 사당은 묘역의 동쪽 구릉에 위치하고 있다. 사당은 원래 종가 뒤편에 있었으나 몇 차례 이전하여 지금의 위치로 옮긴 것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규모를 갖추고 있다. 지금의 사당은 2000년에 사당을 완전히 해체한 뒤 쓸 만한 재목만을 간추려 다시 원형대로 복원한 것이다. 사당은 맞배지붕의 형식을 갖추고 있으며, 기와지붕 양 옆으로 비바람을 막을 수 있도록 방풍널을 달았다. 사당 주위로 기와지붕 담장을 둘러 보호하고 정면에는 1칸 규모의 솟을대문을 세웠다. 사당 실내 중앙에는 임영대군의 신주가 모셔져 있고, 나머지 공간에는 제사에 쓰이는 그릇과 옷이 보관되어 있다. 사당의 한 칸은 원래 서고로 사용하면서 고문서와 유물을 두었는데 6·25전쟁 때 모두 없어졌다고 한다. 사당에서는 매년 음력 1월 21일이 되면 전국의 후손들이 모여 임영대군 제사(기신제)를 지내고 있다.
『(경기도 역사와 문화)백문백담』
『경기 묘제 석조 미술上·下-조선전기 해설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