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인 서봉사지 현오국사탑비(龍仁 瑞鳳寺址 玄悟國師塔碑)는 보물 제9호로 소재지는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신봉동 산110번지이다.
고려시대의 고승 현오국사를 기리기 위하여 세운 부도탑비이다. 서봉사가 언제 창건되었고 언제 폐사되었는지 기록이 없다. 다만 절터의 규모로 보아 상당히 큰 절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전설에 의하면 임진왜란 때 절에서 내려오는 쌀뜨물이 10리나 흘러 내려갔고 이를 왜적이 따라 올라와 절은 불태웠다고 한다. 임진왜란 당시 많은 수의 절이 왜군에 의하여 약탈을 당하고 불에 탄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점을 고려하여 볼 때, 한양으로 진입하는 길목에 있는 서봉사가 왜군에 의하여 불에 탔다는 전설은 사실일 가능성이 크다. 이 절터에서 수습되는 기와나 자기편으로 미루어 보아도 대체적으로 17세기 경에 폐사된 것은 분명한 것 같다. 그런데 이 곳이 서봉사터로 밝혀지게 된 것은 1979년이다. 당시 현오국사비를 보호하기 위하여 비각을 세우는 공사 도중에 <瑞鳳寺(서봉사)> 명문이 새겨진 기와조각이 발견되었다. 따라서 이곳이 문헌에 보이는 서봉사의 옛터임이 밝혀졌다.
현오국사는 이름이 종린, 송성은 왕씨이다. 15세에 불일사에서 승려가 된 후 부석사의 주지를 거쳐 명종 8년(1178) 53세의 나이로 입적하였다. 왕이 크게 슬퍼하여 국사로 삼고 시호를 현오라 한 뒤 동림산 기슭에서 화장하였다고 한다. 화장 후 사리를 어떻게 처리하였는지 알 수 없다. 대개 탑비와 부도가 같이 만들어지지만 현오국사는 비석만 있을 뿐 부도가 없다. 비석은 입적 후 7년이 지난 1185년에 세웠다. 비문은 이지명이 지었고, 글씨는 초서의 대가로 이름 높던 유공권이 썼다.
이 비석은 크게 지대석과 비신으로 구분된다. 지대석은 상면 네 변을 비스듬히 잘라서 모를 죽이고 문양도 새기지 않은 간략한 모습이다. 비공은 아주 얕게 파여져 있는데 이수나 개석이 없어서 깊이 파서 비신을 고정할 필요가 없었던 것 같다.
비신은 점판암을 다듬어 만들었다. 상단 양 모서리를 귀접이하여 균형을 이루도록 하였다. 이 같은 양식이 비석으로는 보경사원진국사비, 억정사대지국사비, 보광사중창비 등이 있다. 껍질이 벗겨지듯 표면이 탈락되는 점판암의 특성으로 특히 하단부에 탈락 현상이 심하다. 전체적으로 돌의 결을 따라 우측에서 좌측으로 사선을 이루며 풍화흔이 형성되어 있다. 비신의 상단에는 직사각형의 제액이 마련되었으며 제액 주변에는 띠 모양의 장식이 둘러져 있다. 제액에는 세로로 네 줄을 이루며 <贈諡玄悟國師碑銘(증시현오국사비명)>이라 전서로 쓰여있다. 글자 크기는 약 8㎝이다. 제액 아래로는 액자처럼 띠를 돌리고 비문을 새겼다. 글자는 해서로 크기는 3.3㎝이다.
이 비석은 신라 말 이후 전형적인 석비 양식이 되었던 귀부, 비신, 이수 등으로 구성되는 양식에서 벗어난 새로운 석비 양식으로 주목된다. 개석과 장식을 생략하고 간략화 해가는 고려 말의 새로운 석비 계통의 유례를 보여주고 있다.
비석은 현재 1979년에 건립한 비각 속에 보호되고 있다.
(자료출처 : 『문화재대관(보물편·석조2, 개정판)』)
『문화재안내문안집. 1』
『용인시 문화재총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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