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간공김세필묘역일원(文簡公金世弼墓域一圓)은 경기도문화재자료 제92호로 소재지는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죽전로264번길 11이다.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학자인 십청헌(十淸軒) 김세필(1473∼1533)과 그 자손들의 묘이다. 김세필 선생은 연산군 1년(1495) 사마시에 합격하고 곧바로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지내다가 사헌부 지평에 올랐으나, 연산군 10년(1504)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거제도에 유배되었다. 1506년 중종반정으로 풀려난 뒤 예문관 응교(應敎)로 기용되었다가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다. 이어 전한(典翰), 광주목사, 전라도 관찰사, 대사헌을 역임하고 이조참판에 임명되었으며 중종 15년(1520) 중국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 해 겨울 기묘사화가 일어나 중종이 조광조에게 사약을 내렸는데 이를 부당하다고 규탄하다가 경기도 유춘역으로 귀양갔다.
중종 17년(1522)에 귀양에서 풀려났지만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고향에 내려가 공자당(工字堂)을 짓고 제자를 가르치며 생을 마쳤다. 이에 조정에서는 그 공로를 인정하여 이조판서의 벼슬을 내렸으며 충주의 팔봉서원에서 제사를 드리고 있다. 김세필은 당대의 김안국(金安國, 1478~1543)과 쌍벽을 이루던 학자이며, 특히 경학에 해박한 지식을 지녔다. 저서로는 『십청유고(十淸遺稿)』가 있으며 시호는 문간이다.
이 묘역에는 김세필 묘를 비롯하여 1400년부터 조선 후기 사이에 만들어진 그 자손들의 묘가 놓여 있다. 김세필의 묘역은 김훈(金薰)과 김저(金儲, 1512~1547) 묘역의 중간에 자리하며, 산 경사면을 따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다. 묘역에는 봉분 2기를 비롯하여 묘비, 상석, 향로석, 문인석, 장명등, 망주석 등이 있다. 봉분의 양쪽에 위치한 신구(新舊)의 묘비 가운데 처음 것은 대리석을 재질로 이용하였으며 글씨는 선명하고 좌대 위에 설치되어 있다. 묘역의 입구에 자리한 신도비는 개석과 비신, 대좌로 이루어져 있다. 개석은 팔작지붕의 형태이며 비신은 대리석을 재질로 사용하였다. 글씨는 비교적 양호한 편이며 앞면에 총알 자국이 남아 있다. 이 신도비의 글씨는 우암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이 지었으며, 숙종(肅宗) 4년(1678)에 건립하였다.
(자료출처 : 문화재청 / 『경기문화재총람-도지정편1』)
『용인시 문화재 총람』
『용인시의 역사와 문화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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