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천 호로고루(漣川 瓠蘆古壘)는 사적 제467호로 소재지는 경기도 연천군 장남면 원당리 1257-1번지 일대이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호로고루가 있는 고랑포 일대의 임진강을 과천·호로하(瓠瀘河) 또는 표하(瓢河)라 불렀음을 알 수 있으며, 인근 마을 주민들은 호로고루를 자미산 또는 재미성(財尾城)이라 부른다. 호로고루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1670년(현종 11)에 편찬된 『동국여지지』이다. 『동국여지지』에는 ‘호로고루는 부의 동쪽 32리 호로탄 위에 있다. 그 동쪽은 적성현과의 경계이며 두 개의 루(槮)가 강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는데 석벽으로 인하여 견고하다. 전하기를 삼국시대 둔술처(屯戌處)라 한다’고 하였다. 『경기읍지(京畿邑誌)』에서는 ‘당의 유인궤가 병사들을 인솔하여 호로하를 끊고 신라의 칠중성을 공격한 것이 바로 이 성이다’라고 하여 보다 구체적인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호로고루에 대한 최초의 학술조사 기록은 1916년에 발간된 『조선고적조사보고(朝鮮古蹟調査報告)』인데, 이 보고서에는 도면과 사진이 수록되어 있고 삼국시대 성으로서의 중요성에 대하여 기술하고 있다.
임진강과 한탄강은 현무암대지를 침식하며 흘러 강의 양쪽에 높이 10m가 넘는 수직단애를 형성하고 있다. 이 수직단애는 자연장애물이자 천혜의 요새를 구축할 수 있는 여건을 제공해 주어 임진강과 한탄강은 6세기 중엽 이후 200여 년 동안 고구려와 신라의 국경하천 역할을 하여 왔다. 임진강의 양안을 따라가며 주요 길목마다 구축되어 있는 고구려와 신라의 성곽이 그것을 입증해 주고 있다. 그 중에도 호로고루는 조수간만의 영향을 받는 감조구간(感潮區間)의 상류에 위치하여 임진강 하류에서부터 배를 타지 않고 도하할 수 있는 최초의 여울목에 접하여 있다. 이런 영양으로 평양에서 출발한 고구려군이 백제 수도인 한성으로 진격하는 가장 빠른 길은 개성과 장단을 지나 호로고루 앞의 여울목을 말을 타고 직접 건너가는 것이 었다. 호로고루가 있는 고랑포 일대는 『삼국사기』에도 여러 차례의 전투기사가 등장할 정도로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다. 조선시대에도 이 지역은 호로탄(瓠槙灘)이라 하여 장단을 통해 개성으로 들어가는 주요 길목이었으며, 한국전쟁 당시에도 북한군의 주력 전차부대가 개성을 통과하여 문산쪽으로 직진하지 않고 우회하여 도하한 지점이기도 하다.
호로고루는 1991년 문화재 연구소가 실시한 군사보호구역내의 문화유적 지표조사를 통하여 고구려유적임이 알려지게 되었다. 이후 1998년 토지박물관에 의하여 다시 정밀지표조사가 이루어졌고, 2001년 동벽을 중심으로 한 1차 발굴조사가 실시되었다. 2005년에는 성 내부에 대한 전면 시굴 및 건물터에 대한 2차 발굴조사가 실시되었으며, 2009년에는 지하식 벽체 건물터를 중심으로 한 성 내부의 동쪽 부분에 대한 3차 발굴조사가 실시되었다. 호로고루는 그 중요성이 인정되어 2000년 경기도기념물 제174호로 지정되었고, 2006년 1월 2일자로 사적 제467호로 지정되었다.
호로고루는 15m 정도 높이의 절벽으로 이루어진 임진강 북안의 뾰족한 자연지형의 한쪽을 성벽으로 틀어막아 구축한 삼각형의 강안평지성(江岸平地城)이다. 성벽의 전체 둘레는 401m이며, 동벽은 93.1m·남벽은 161.9m·북벽은146m 이다. 성벽은 한들벌로 이어지는 동쪽부분만
남북을 가로막는 지상성벽을 쌓았다. 나머지 두벽은 암벽의 윗부분에서 현재의 지표면까지 높이 2~3m 정도 높이로 돌아가면서 편축식으로 쌓았는데 편축식 성벽의 구조상 성벽이 지상으로 올라오지는 않았을 것이므로 성벽상부에는 목책을 설치하여 밖에서 성 내부가 보이지 않도록 하였을 것을 추정되고 있다. 동벽은 기단부와 중심부는 점토와 마사토로 판축(版築)을 하고 성벽 내·외부는 석축(石築)을 하였음이 확인되었다. 특히 외벽의 바깥쪽에는 암반층에서부터 쌓아올린 보축성벽을 체성벽에 덧붙여 성벽에 견고함을 더하였다. 이러한 형태의 축성기법은 축성이 용이하다는 토성의 장점과 내구성(耐久性)과 방어력을 높일 수 있는 석축성의 장점을 모두 취한 고구려의 뛰어난 축성기술을 보여주는 것으로서 고구려 수도인 중국 집안의 국내성(國內城)과 평양의 대성산성(大城山城) 등에서도 이러한 축성기법이 확인되었다.
보축성벽의 외면에는 기저부에서 5m 정도 거리를 두고 신라성벽을 덧붙여 쌓았다. 그러나 고구려성벽에는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현무암 성돌이 주로 사용된데 비하여, 신라성벽은 화강편마암이 주류를 이루어 성을 쌓은 장인(匠人)들은 자신들이 다루기 편한 암질을 선택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1차 발굴조사 도중 동벽 단면의 판축토 내부에서 고구려 토기편이 확인되어 동벽이 구축되기 이전에도 고구려 유구가 있었을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이에 대한 의문은 2차 발굴조사에서 해결되었는데 호로고루에는 자연지형을 따라 구축된 목책이 먼저 있었는데 대규모 토목공사를 통하여 성 내부를 평탄하게 조성하고 지상구조물인 동벽을 구축하였음이 확인되었다. 따라서 성 내부의 유구는 기와가 전혀 사용되지 않았던 목책시기와 기와건물이 구축되는 석축서벽 시기로 구분되고 있다.
목책열로 추정되는 주공은 220㎝ 정도 이격되어 2열이 남아 있는데 목책열의 주공 간격은 180~190㎝ 이며 목책열의 안쪽에는 토광유구가 이어지고 있어 청원 남성골산성과 유사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지금까지 성내에서 확인된 유구는 기와 건물터와 지하식 벽체건물터·수혈유구·우물 등이다. 기와건물은 낮은 지형을 성토하여 지반을 조성하고 10㎝ 크기의 할석으로 직경 1m 정도의 적심을 쌓고 그 위에 초석을 올려 놓은 상태로 확인되었다. 건물의 규모는 정면칸 3칸, 측면칸 2칸이며 정면칸은 180㎝, 측면칸은 210㎝ 정도의 간격을 유지하고 있다. 그 외에도 지하식 벽체건물터가 확인되었는데 생토면을 6×6m 규모에 깊이 3m 정도 파고, 네벽면에는 30~40㎝ 크기의 현무암 할석으로 쌓고 뒷채움을 하였다.
이 벽체건물터의 바닥에는 직경 20㎝ 정도의 통나무를 깔아서 만든 구조물이 그대로 남아있으며, 무너진 목재구조물위에 부엽공법처럼 갈대와 잔가지 등을 1m 정도의 두께로 깔고 점토로 다진 후 재사용하였음이 확인되었다. 점토층 위에는 동물 뼈가 집중적으로 출토되는 지점과 탄화된 곡물이 출토되는 공간으로 구획되는데 아마도 창고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호로고루에서는 구석기시대의 주먹도끼를 비롯하여 삼국시대부터 통일신라, 고려,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유물이 출토되었다.
출토된 유물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기와류이다. 기와는 대체로 고구려기와와 통일신라기의 기와, 고려·조선시대의 기와로 크게 구별할 수 있다. 특히 고구려기와는 현재까지 조사된 남한지역의 고구려유적 중 가장 많은 양이 출토되고 있으며, 층위적으로도 명확하게 구분됨으로써, 고구려와의 연구에 획기적인 자료를 제공하게 되었다. 이곳에서 발견되는 고구려와는 크게 승문(繩文)·거치문(鋸齒文)·격자문(格子文)·사격자문(斜格子文)·횡선문(橫線文) 등으로 구분되며, 모래가 거의 섞이지 않은 니질태토에, 산화소성을 하여 적갈색이나 황갈색을 띠고 있으며, 내면에는 예외 없이1.9~2.4㎝ 크기의 모골(模骨)이 찍혀있고 암키와는 상단 양쪽의 귀를 접었으며 수키와는 제작과정에서 찍힌 타날문을 지워버린 것이 특징이다.
또한 호로고루에서는 깃털이나 물고기 비늘 모양의 문양이 있는 치미편과 연화문와당, 착고기와 등 건물의 위계를 새롭게 볼 수 있는 각종 건축부자재가 출토되었다. 치미는 기와건물의 용마루 꼭대기의 양쪽에 설치되어 건물의 화려함을 더해주는 건축 재료로 지금까지 조사된 고구려유적 중에서도 중국 집안의 동대자 건물터나 평양 정릉사지 등 왕궁이나 사찰로 추정되는 일부 건물터 외에는 거의 발견사례가 없었다. 연화문와당은 6엽의 연화문와당이며, 6점 모두 동일한 나무판으로 찍어낸 것으로 확인되었는데 그 중 한 점은 곱새기와의 와당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 외에도 와당이 부착되었던 수키와편과 함께 착고기와도 여러 점 출토되었다. 이로써 호로고루에 있었던 기와건물은 용마루에 착고기와와 치미가 있고, 건물의 내림마루에는 곱새기와가 있고 처마끝에는 연화문와당이 사용된 화려하고 품격있는 기와건물이 있었음을 알 수 있게 되었다.
토기류는 고구려토기와 통일신라기의 토기, 고려시대 이후의 도기류로 대별된다. 고구려토기는 대형호와 시루 등이 주류를 이루며, 대상파수가 부착되고, 니질태토에 흑갈색이나 적갈색을 띠고 있으며, 표면은 마연을 한 것이 특징이다. 그 외에도 전돌과 삼족벼루를 비롯하여 호자, 고구려관모 형태의 토제품, 흙으로 만든 북 등이 출토되었다. 특히 지금까지 발굴에서는 최초로 고구려 악기인 토북은 새겨진 명문으로 보아 ‘상고(相鼓)’라고 불리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구연부의 직경은 55㎝ 정도이며, 가죽을 묶을 수 있도록 3열의 구멍이 일정한 간격으로 뚫려 있다. 통일신라기의 토기류는 단각고배류와 완, 파상문 장경옹 등이 출토되는데 토기의 속성을 보면 대략 7세기 후반으로 분류될 수 있는 것이어서 역사적으로 신라가 이 지역을 장악하는 시점과 거의 일치하고 있다. 또한 이곳은 개성에서 인접한 관계로 상당히 고급스러운 상감청자와·분청사기편이 많이 출토되고 있다. 특히 치부분을 포함한 성벽의 표토층에서 출토되는 유물의 절대량은 자기와 도기편들인데 대략 14세기 말에서 15세기 초로 편년될 수 있는 것으로서 고려 말부터 조선 초기에도 이곳에 일정기간 상당한 세력이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게 한다. 이외에 ‘○소와칠백십대와(○小瓦七百十大瓦) ○백팔십용대사백삽합천…(○百八十用大四百 合千)’·‘관(官)’·‘갑(甲)’·‘함국(咸國)’ 등의 글씨가 새겨져 있는 기와
쌀·조·콩류 등의 탄화곡물과 소·말·사슴·개·멧돼지 등 다양한 동물 뼈가 출토되었으며, 금속유물로는 다양한 화살촉과 도자류·금동불상 등이 출토되어 호로로루의 기능과 위상을 이해할 수 있게 해 준다.
호로고루는 고구려가 한강유역으로 남하할 당시 목책이 구축되어 있었으나, 6세기 중엽 임진강유역으로 후퇴하면서 임진강은 이후 120여 년간 고구려와 신라의 국경이 되었다. 이때 고구려는 임진강에 국경방어시스템을 구축하게 되는데 호로고루는 그 사령부 역할을 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대규모 토목공사를 통하여 성 내부를 성토하여 평탄하게 조성하고, 목책이었던 동벽을 판축과 석축성으로 새롭게 구축하였으며 성내에는 치미와 와당을 사용한 지상건축물을 구축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호로고루는 종합정비계획에 따른 연차발굴조사와 정비·복원사업이 추진되고 있다. 남쪽과 북쪽의 단애면의 잡목을 제거하고 성내에는 탐방로가 조성되었으며, 동벽정상부와 성내 서쪽 끝 부분에는 관람용 데크가 설치되어 있다. 노출된 성벽은 전체적으로 복토하여 잔디를 식재하고, 동벽 외면에는 신라시대에 덧붙여 쌓은 석축성벽의 일부가 노출되어 있다.
(자료출처 : 『문화재대관 사적 제2권(증보판)』)
『남한 내 고구려 성곽의 구조와 성격』
『국가지정문화재 지정보고서-사적편 Ⅰ-Ⅱ』
『고구려 유적의 보고 경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