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수허목묘역(眉叟許穆墓域)은 경기도기념물 제184호로 소재지는 경기도 연천군 왕징면 강서리 산90번지이다.
허목(許穆, 1595~1682)은 조선 중기의 대학자이자 서예가이다. 자(字)는 문보(文父), 화보(和甫)이며, 호(號)는 미수(眉叟), 본관은 양천이다. 1595년 연천현감 허교의 아들로 출생하여 1615년(광해군 7년) 정언웅에게서 글을 배우고, 1617년 부(父)가 거창현감에 임명되자 부친을 따라가서 문위(文緯)를 찾아가 스승으로 섬겼다. 1624년(인조2년) 광주의 우천에 살면서 독서와 글씨에 전념하여 그의 독특한 고전팔분체(古篆八分體)를 완성하였다. 이는 독특한 전서체로 우리나라 서예사에 있어 혁명적인 업적으로 평가되며 후기 추사체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친 것으로 여겨진다. 1657년 정계생활을 시작, 1674년(현종 15년) 서인이 실각하고 남인이 집권하자 이조판서를 거쳐 우의정에 승진되어 과거를 거치지 않고 삼공에 올랐다. 1678년 판중추부사에 임명되었으나 곧 사직하고 고향인 연천으로 돌아와 저서와 후진양성에 전념하였다. 남명 조식의 제자인 정구를 스승으로 삼아 제자백가와 경서의 연구에 전심, 특히 예학과 고학에 일가견을 이루었으며 그림, 글씨, 문장에 모두 능하였다. 글씨는 특히 전서(篆書)에 뛰어나 동방 제1인자라는 찬사를 받았다. 저서로는 『동사(東事)』, 『방국왕조례(邦國王朝禮)』, 『미수기언(眉叟記言)』 등이 전한다. 그는 효종 사후 당대의 유명한 유학자 송시열과의 예송논쟁으로 유명하며, 사후에 문정이란 시호를 받았다.
그의 묘역은 민통선 내에 있는데 묘역은 안월천을 건너는 강서 5교를 지나 북쪽으로 300m 정도 직진하면 좌측의 능선 해발 100m에 위치한다. 선조인 허자의 묘와 약 100m의 거리를 두고 있다. 미수허목묘는 동남향한 나지막한 구릉 상에 6기의 묘 가운데 제일 아래에 위치하고 있으며 바로 위에는 부인 전주이씨의 묘가 있다. 묘역에서 동쪽으로 500m거리에는 그가 생전에 살던 집인 은거당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은거당에는 10가지의 늘 푸른 나무가 있다하여 십청원이라 불리는 정원과 기이한 암석을 모은 괴석원이 있었다고 하는데 한국전쟁으로 전소된 이후 현재는 그 터만 남아 있으며 허련이 그린 십청원도에서 그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원형의 봉문은 단분(單墳)으로 단독장묘(單獨葬墓)이다. 규모는 직경 670㎝, 높이 170㎝이다.
물로는 묘갈(墓碣) 1기, 장명등 1기, 문인석 2기, 망주석 2기, 상석 1기, 향로석 1기 및 계체석(階砌石) 등이 있다. 봉분 앞의 묘갈은 원수방부(圓首方趺)의 형태로 비신은 하얀색이 감도는 대리석제를 사용하였고, 비대는 화강암재를 사용하였다. 비신의 비양(碑陽)에는 중앙에 1행의 전서체로 ‘우의정문정공미수허선생지묘(右議政文正公眉叟許先生之墓)’라고 새겨져 있다. 비음(碑陰)에는 ‘허미수자명(許眉叟自名)’으로 시작되고, ‘작자서(作自序)’로 끝을 맺는 허목 자작(自作)의 명(銘)과 서(序)가 음각되어 있다. 이 자서명(自序銘)은 그가 사망하기 2년 전인 86세때, 즉 1680년에 남겨두었던 것이었다. 이러한 자서명이 새겨진 묘갈은 상당히 드문 경우의 예이다.
이밖에 허목 묘역 주변에 있는 유물을 살펴보면, 허목 묘역의 약 50m 하단에는 허목의 5대조인 허훈(許薰, 1416~1473)과 부인 고성이씨(固城李氏)의 합장묘를 이장할 때 출토된 석곽(石槨) 2기가 종중에 의해 이동되어 배치되어 있다. 그리고 한국전쟁으로 인하여 소실된 허목이 살았던 은거당(恩居堂)의 정원을 조성하였던 괴석(怪石) 2점도 위 석곽 옆에 옮겨 배치되고 있다.
(자료출처 : 문화재청 / 연천군청 / 『경기문화재총람-도지정편2』)
『향토 사료집-지명유래, 문화유적·유물』
『미수허목 종합정비 기본계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