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주 고달사지 원종대사탑비(驪州 高達寺址 元宗大師塔碑)는 보물 제6호로 소재지는 경기도 여주시 북내면 상교리 419-3번지이다.
이 비석은 신라 말 고려 초의 선승이었던 원종대사의 위엄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부도탑이다. 비문에는 원종대사의 탄생에서 입적에 이르기까지 전 생애와 비석이 세워진 배경에 대하여 기록되어 있다. 비신은 1915년 봄에 넘어져 8조각으로 깨졌다. 현재 고달사터에는 귀부와 이수만 남아있다. 비신은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져, 현재는 경복궁 근정전 서쪽회랑에 진열되어 있다.
원종대사의 이름은 찬유, 속성은 김씨이다. 13세에 출가하여 상주 삼랑사에서 융제선사에게 불법을 배웠다. 22세에 양주 삼각산 장의사에서 구족계를 받았고 23세 때 당나라로 유학하였다. 당나라 서주 동성현 적주산에서 자선화상에게 사사하고, 신라 경명왕 5년(921)에 귀국하여 현재 경남 창원에 있는 봉림사에 머물렀다. 봉림사는 9산 선문의 하나인 봉림산문의 중심사찰이다. 봉림산문을 세운 진경대사 심희는 29년간 고달사에 머물러 있었던 원감국사의 법통을 이어받은 제자였다. 진경대사가 원종대사에게 법통을 물려주었으므로, 원종대사는 고달선원의 제3대 정신적 지주가 된 셈이었다.
원종대사는 광종과 깊은 인연을 가지고 있었다. 광종이 대사를 초빙하여 국사로 예우하였으며, 대사가 입적한 후 971년에는 고달원은 도봉원, 희양원 등과 함께 3대 사원으로 삼아 법맥이 길이 이어지도록 하였다. 그 후 대사는 958년 90세로 입적하였다. 광종은 시호를 원종대사, 부도탑의 이름을 혜진탑이라 내렸다. 비문은 김정언이 짓고, 글씨와 전액은 장단설이 썼으며, 이정순이 글자를 새겼다.
비석을 세운 것은 비석 본문에 975년(광중 26)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음기 맨 뒤에는 ‘처음 명인년(966, 광종 26)에 시작한 비와 탑의 공사가 마침내 정축년(977, 정종 2)에 이르러 공역을 끝났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비석을 건립한 시기가 975년인지 977년인지 분명하지 않다. 아마도 비석은 975년에 세워졌으나 부도탑이 세워진 것은 977년으로 보인다. 부도탑과 탑비가 하나로 연결된 공사이기 때문에 모든 공사가 마무리된 977년 음기를 작성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귀부는 지대석과 함께 거대한 하나의 돌로 구성되어 있다. 머리는 용의 형상을 하고 있으며, 목은 수직으로 세워 정면을 바라보고 있는데 목의 길이가 아주 짧아 신라 말의 비석에 미하여 퇴화된 형식을 보여주고 있다. 두 눈은 부릅뜨고 정면을 노려보고 있는데, 치켜 올라간 눈꼬리 때문에 더욱 위협적으로 보인다. 콧 등에는 주름이 잡혀 있어 코를 벌름거리는 듯하다. 입은 약간 벌려서 이를 다물고 있으나 여의주는 물고 있지 않다. 두 귀는 큼직막하게 조각되어 아주 특징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발은 크고 두툼하며, 5개의 발가락과 발톱이 상세하게 표현되어 있는데 큰 발로 지대석을 누르고 버티어 앉은 모습으로 한껏 사실감이 돋보인다. 등에는 2중의 6각형 귀갑이 벌집 모양으로 정연하게 조각되었다. 중앙부에 비좌가 마련되었는데 귀갑 위에 한 단 높게 소용돌이치는 구름무늬를 조각하고 그 위로 비좌를 돌출시켰다. 비좌의 높이가 아주 낮아서 신라 말 고려 초의 비좌에 흔히 보이는 안상은 조각되지 않았다. 비좌 상면에는 연화문이 새겨져 있는데 아래로 늘어져 비좌를 덮고 있는 것 같다.
전체 모양이 직사각형에 가까운 이수는 중앙에 제액을 두고 이를 중심으로 구름과 어우러진 용을 조각하였다. 특히 용두는 모서리에 송곳니가 빠져나와 있는데 입을 벌리고 여의주를 물고 있는 힘찬 모습이다. 이수 상면 중앙에는 작은 구멍이 뚫어져있는데 보주를 꽂았던 흔적으로 추정된다. 이수 하면에는 연꽃을 둘러 새기고 그 위로 1단의 층을 두었다. 제액은 사각형의 액을 만들고 그 안에 3줄로 ‘혜목산고달선원원종대사지비(慧目山高達禪院元宗大師之碑)’라 쓰여 있으며, 제액 아래는 도깨비가 받치고 있다.
원종대사부도비 귀부와 이수는 현재 한국에 남아있는 귀부와 이수 중에서 규모가 가장 크다. 고려 초에 새로운 왕조의 웅대하고 활달한 기풍을 잘 보여주고 있다. 양식적인 면에서도 전체적으로 각이 깊고 뚜렷하며 특히 귀부의 조각에서 용두의 형상, 크고 두툼한 발, 튀어 올라온 거북 등의 표현 등은 독특한 양식이 잘 나타나 있고, 신라 말의 비석에서 보기 어려운 힘을 느끼게 한다. 아울러 당시 원종대사의 영향력이 얼마나 지대했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게 한다.
또한 부도탑과 탑비를 세우는 과정에 대한 자료가 있어 주목된다. 비문에는 국공이 파견되어 부도탑과 탑비를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어서 부도나 탑비의 제작을 국가에서 적극적으로 통제하였던 사정을 짐작하게 한다. 비석과 부도탑을 세운 시점이 각각 차이가 있음을 기록하여 부도탑고 탑비가 반드시 동시에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밖에 광종의 불교정책과 선종승려와이 관계를 살펴볼 수 있다는 점에서도 주목되는 자료이다.
(자료출처 : 『문화재대관(보물편·석조2, 개정판)』)
『(국보·보물) 문화유산을 찾아서-경기도, 인천광역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