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주 파사성(驪州 婆娑城)은 사적 제251호로 소재지는 경기도 여주시 대신면 천서리 산8-10번지이다.
파사산 밑을 감돌아 흐르는 남한강의 상류와 하류 지역이 한눈에 들어오는 천연적 요새라 할 수 있다. 성의 이름이 신라 제5대 파사이사금(婆娑尼師今, 80~112)과 똑같아 그 때 만들어진 것으로 여겨지며, 위치로 보아 신라의 북진 과정과 관계가 있을 것 같다. 임진왜란(1592~1598) 때에는 유성룡(柳成龍, 1542~1607)의 건의에 따라 승군총섭(僧軍總攝) 의암(義巖)이 승려를 동원하여 쌓았다는 기록이 있다. 이처럼 지금의 성벽은 삼국시대에 처음 쌓은 다음 여러 차례 고쳤다.
산꼭대기를 중심으로 능선을 따라 쌓은 성의 둘레는 950m쯤 되며 높이는 주변 지세에 따라 차이가 있는데 4.5m 안팎이다. 그리고 크기 45㎝×35㎝×55㎝의 성돌은 잘 다듬은 다음 차곡차곡 쌓아 올렸으므로 바깥쪽은 아주 정연하다. 성문터는 동쪽과 남쪽에서 발견되었으며 물이 빠지는 수구(水口)도 남문터 옆에 있다. 동문터는 산꼭대기 쪽의 여주 천서리에 있는데 옹성(甕城)의 모습이며, 양평 상자포리 쪽의 남문터에는 높다란 기둥 모양과 편평한 주춧돌이 남아 있다.
신라 파사이사금 때 남·여 두 장군이 내기를 하여 쌓았다는 이야기가 전해 온다. 남장군은 나막신을 신고 중국을 다녀오고 여장군은 파사성을 쌓기로 하였다. 그런데 먼저 남장군이 돌아와서 내기에 이겨 성은 미완성 상태로 남아 있다는 것이다. 성 북쪽에 있는 바위에는 여장군의 모습이 음각으로 새겨져 있고 성을 쌓을 때 음료수를 담기 위하여 팠다는 큰 바위 구멍도 있다.
삼국통일 후 신라군과 당나라군이 큰 싸움을 벌였다는 매초성(買肖城)을 이 곳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자료출처 : 『경기문화재총람-국가지정편1』)
『경기문화재대관-국가지정편』
『경기도의 성곽』